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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소희 Jun 19. 2017

아버지, 그리고 나

6.25한국전쟁 참전용사였던 아버지

 

    

‘소설가가 되고 싶다’도 아니고 ‘소설가가 되어야겠다.’는 절대적인 이유를 가슴 속에 품게 된 시작은 보훈병원에서부터였다. 하지만 그건 잠깐의 몽상 같은 것이기도 했다.  너무나 막연하고 우연적인 발상이어서 실현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품어본 생각이었다. '대통령이 꿈'이라고 앞니 빠진 이를 드러내고 웃는 어느 천진한 아이처럼 말이다.

아버지는 폐암으로 보훈병원에 입원을 하게 됐다. 아픈 아버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휠체어에 아버지를 태우고 병실복도를 왔다 갔다 하는 일이었다.


복도로 외출(?)을 할 때마다 마주치던 젊은이가 있었다. 처음엔 유난히 하얀 피부가 눈에 띄었고, 그의 나이가 젊다는 데 내 시선이 갔다. 앞으로의 그가 살아갈 세상이 염려가 됐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우연히도 그가 아버지가 입원해있던 병실 옆방으로 쑥 들어가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무척 놀랐다. 그 병실은 상이군인들만 출입하던 병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보훈병원은 다른 병원과 분위기가 다르다. 환자들이 호통 치면 병원관계자들이 쩔쩔맨다.


“내가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아깝게 여기지 않았던 사람이야. 나를 이따위로 대접해!”


그분은 분명 월남전에 참전했으리라.  아버지를 태운 휠체어를 끌고 고엽제 환자들이 약을 타는 코너를 돌다가 우연히 2층 위에서 아래층 소란을 목격하게 됐다. 그 광경을 목격한 아버지는 호탕하게 웃으셨다.


"환자가 병원에 와서 큰 소리 치는 건 보훈병원 밖에 없을 거다. 우하하!"


죽음을 앞둔 아버지의 웃음,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말기 암으로 인해 이제 남은 생이라고 해봐야 고작 이 삼 개월인 저렇게 웃음이 나오실 수가 있을까.


그러고 보니 나는 한 번도 아버지로부터 전쟁 때문에 자신의 삶이 망가졌다는 원망을 들은 적이 없다. 아버지도 가끔은 학교를 다니다말고 학도병으로 지원을 하게 된 그 선택을 후회했을 법도 한데도 말이다.


군인으로 전역해서 생활능력이 없다고 불평한 쪽은 오히려 가족들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억울한 청춘을 보상해달라고 국가를 향해 떼를 써본 적도 없다. 어떻게 해서든지 건수만 생기면 정부 돈을 타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는 것이 대다수의 사람들의 삶의 방식 아니던가. 무공수훈자자녀에게도 대학장학금 혜택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우리 삼 남매가 장기 융자며, 과외며 안 해본 것 없이 어렵게 대학졸업을 다 마치고 난 후였다.


폐암이 다른 장기로 전이 됐음을 알고도 아버지는 병원에 선뜻 입원을 하지 못했다. 입원비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보훈병원에 입원을 하게 된 것도 우연히 타게 된 택시때문이었다.


"6.25 참전용사면 보훈병원에 입원할 수 있을 거예요. 제 장인도 참전용사였는데 보훈병원에서 돌아가셨거든요"


택시운전사의 귀띔 덕에 아버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국가가 주는 혜택을 받게 되었다.


난 아버지의 초연한 생각을 떠올리면 내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군인이었다는 것에 대해, 후회도 그렇다고 애정도 보이지 않는 무심의 절제된 자세. 그런 태도 때문에 난 아버지를 많이 오해하기도 했다. 가난 밖에 물려준 게 없는 아버지라고 젊은 시절 내내 원망하고 불평했으니 말이다. 전장을 누비지 않은 내가 아버지를 이해하기란 설령 내가 죽는다 해도 불가능할 것이다.



전쟁은 재난이었다. 한 사람이 겪어야 할 고난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짊어져야 할 위기였다. 개인의 삶도 국가가 존재해야 보장되는 법이다. 아버지는 위태로운 시절에 학도병이 된다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생각이 그러했던 분이니 혹시 국가가 베풀어주는 특별한 대우가 있다한들 무슨 관심이 있었겠는가.


뇌까지 암세포가 전이가 되어 몸서리치는 진통으로 생사를 오고가는 아버지를 두고 미국에 와야 했던 내가 우여곡절 끝에 진짜로 허풍처럼 마음먹었던 소설가가 되었다.


습작으로 시작한 소설의 배경에는 휠체어에 타고 있었던 그 잘생긴 상이용사가 있었고, 고엽제 치료약을 타며 고함을 치던 아저씨의 몸부림이 있었다.


말하자면 6.25참전용사였던 아버지가 나를 소설가로 만들어 준 셈이다.


전쟁은 일어나지 않아야 될 일이다. 두렵고 무섭다. 그래서 그 두려움을 감춘 채 전쟁에 참전해야 했던 역사의 희생자, 참전용사에 대해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


올해도 나는 보훈병원을 찾았다. 예전의 모습은 찾을 수 없는 그곳에서 어딘가 불쑥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날 것만 같아서다. 2층에서 아래층을 내려다보던 아버지의 웃음소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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