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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소희 May 15. 2019

장진호전투 참전 용사를 만나다

미국 미조리주 스프링필드를 다녀와서 

10인의 한국전 참전용사들이 모였다. 

어니, 엘리엇, 엘마, 데럴, 던, 엘리어스, 알, 해리, 로버트, 맥스는 장진호 전투에서 살아남은 미 육군 참전용사다. 96살로 가장 나이가 많은 던은 내게 제일 먼저 관심을 보였다. 펜실베니아에서 직접 운전하고 여자 친구와 함께 왔다며 해리는 노익장을 과시했다. 미시간에서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미조리주 스프링필드에 온 맥스는 정진호 전투에서 머리에 심한 총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많은 고생을 겪었다고 했다.


10인의 한국전 참전 미국 병사들

  해마다 메모리얼 데이에 미육군 한국전 참전용사들이 스프링필드에 모여 추모식을 거행하는데 작년까지 77명이던 멤버가 줄어 부득이하게 행사를 앞당겨 2019년에는 4월30일에 치르게 되었다.


  그 모임의 회장인 어니 워트링은 한국전이 끝나고 7년이 넘도록 알코올 중독자로 지내다 극적으로 목회자가 된 은퇴 목사님이다. 전쟁 중에 피를 흘린 병사에게 주는 영예로운 표시인 퍼플 하트 2개가 새겨진 그의 모자는 그가 얼마나 용맹하게 싸웠는지 보여주었다. 중공군에게 잡혀 3년 동안 포로 생활을 했다는 엘리엇의 뺨에 깊게 패인 흉터는 아마 전쟁 중에 얻은 상처리라.

Ernie Wotring 이 받은 퍼플하트 훈장은 생사를 오고 갔던 전쟁의 흔적이다.

  장진호 전투는 미군이 치른 전투 중에 최악의 3대 전투에 속한다. 한반도의 험악한 지형은 미군이 갖고 있는 탱크를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고 맹렬한 추위는 미군들에게 결정적으로 악조건이 되고 말았다.


 그때 걸린 동상 후유증으로 헌병출신이었던 데럴은 걷지 못해 휄체어를 타고 그 자리에 참석했다. MP라고 쓴 흰 철모를 쓴 덩치 좋은 미남 병사의 사진은 그의 용맹했던 젊은 시절이었다.


  머리부상으로 운전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맥스가, 알코올 중독으로 전쟁의 상처를 잊고 싶어 했던 어니가, 고령의 몸을 이끌고 온 식구를 대동하고 32번째로 모여 장진호 전투를 기억하는 그 해답을 샤메인의 이야기에서 풀 수 있었다.


  샤메인의 아버지도 장진호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있다 풀려났다. 그런데도 그녀의 아버지는 한국이 그리워 식구들을 이끌고 콜로라도 덴버로 이사를 갔다고 했다. 그곳이 한국을 제일 많이 닮아서다. 작고한 아버지를 대신해 한국전 참정용사들의 오른팔 역할을 하는 그녀의 짐은 벤도 작아보였다. 자동차로 덴버까지 장거리 운전을 마다하지 않는 그녀의 연로한 모친에게서  진정한 인간애라는 게 어떤 것인지 보게 됐다.

전사한 동료에게 미육군 L중대소속이었던 Elmer가 경례하고 있다

  미군노병들은 진심으로 한국을 사랑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동료가 전사한 차가운 북녘 땅을 우리보다 더 잊을 수 없던 모양이다. 그날 행사에 처음 참석했다는 텍사스에서 온 랠리 브라운은 자신의 아버지가 장진호 전투에서 실종되어 생사를 확인할 수가 없다고 했다. 아버지의 옛 전우를 만나며 아버지를 떠올렸을 랠리의 이야기에 나는 뒤척이며 잠을 자지 못했다.


  부끄럽고 미안했다.


미군 짚차를 따라다니며 기브 미 초콜렛!을 외치던 꼬맹이들은 미국 땅에서 ‘성공’이라는 키워드만 좇아갔는데 한국전에 참전했던 미군들은 자신이 피를 흘렸던 한국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너무 연로해서 올해 만난 10명의 노병들을 내년에 다시 만난다는 기약이 없다. 


너무 늦게 그들을 찾았다. 버스를 타기 위해 슬그머니 호텔을 나서는 맥스의 구부정한 뒷모습을 떠올리니 자꾸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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