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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소희 Jul 07. 2019

나를 이끄는 한 권의 책

이젠 내가 작가가 된 이유를 알 것 같다.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군사분계선을 김정은과 함께 넘나들었음을 LA공항에 도착해서야 나는 알게 되었다. 불편한 좌석과 속이 거북해 거의 식사를 하지 못했던 나는 피곤에 지쳐 비행기가 땅을 밟기만을 고대했었는데 땅 밑에서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잠을 제대로 자질 못했는지 저녁식사를 하려고 들렀던 한인 식당 TV에서 나오는 뉴스영상이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부족한 수면 탓일까? 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장한 체격의 두 남자가 오고 가는 모습에 정신이 멍해졌다.


  27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오래 집을 떠난 탓에 책상 위에 우편물이 수북하다. 책상 위에 놓인 영문이름이 적힌 두꺼운 노란 봉투가 눈에 제일 먼저 띄었다.

  Darrell Mcardle? 아! 그였다. 지난 4월 말에 미조리주 스프링필드에 있었던 장진호 전투참전용사 모임에서 만났던 노병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봉투 안에는 한 장의 편지와 함께 ‘Soldiers of the Gauntlet’라는 책이 들어있었다. 아마도 그가 소중히 간직했을.

720헌병대대 소속이었던 데럴이 내게 보내 준 책

  한 달 남짓한 한국에서의 일정은 빠르게 흘러갔다. 만나야 할 사람과 해야 할 일을 미리 목록에 적었지만 예상치 못했던 만남이 추가로 생기도 했다. 올해 6월에는 두 권의 책이 한꺼번에 출간됐던 터라 인사를 위해 책을 챙기는 일 또한 만만치 않았다. 무거운 백팩을 짊어지고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며 서울 시내와 지방을 누볐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이름 석 자를 알리기 위해 꽤나 애를 쓰는 사람처럼 보였으리라.


  작가가 자신의 책을 세상에 내놓는 일은 출산에 비유할 만큼 경이로운 일도 없다. 두 권 모두 거의 10년 동안 묵혔던 글들을 출간했으니 나에게도 감회가 남달랐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분주한 발걸음과는 달리 줄곧 한 가지 생각에만 내달리고 있었다.


  요즈음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는 해파리처럼 떠도는 낭설에도 담담해질 수 있었던 것도, 교보문고 신간 코너에 진열된 내 책이 신기한 듯 바라봤지만 이내 등을 돌렸던 것도 그 한 가지 생각 때문이었다. 출판 시장이 죽었다고는 하지만 신간은 계속 쏟아졌고 며칠 동안 진열대를 차지하다 창고 속으로 밀려나는 베스트셀러를 꿈꾸는 수많은 작가들의 열망이 이젠 부럽지 않은 것도 바로, 그 생각 때문이었다.

  

교보문고 신간도서에 '독박골 산1번지'가 진열되었다는 건 신기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데럴이 내게 보낸 책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부터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미군 병사들의 이야기가 수록된 책이었다. 그 책 속에 그의 젊은 시절 사진도 있었다. MP라고 새긴 철모를 쓴 그는 잘생긴 미군이었다. 일본에 주둔했다가 한국전에 참전했던 그를 포함한 그의 동료들의 이름을 일일이 적은 편지는 내가 미국을 떠나던 날 집에 도착을 했던 모양이다.

데럴이 내게 말하고 싶은 것, 그가 내게 알리고 싶은 것을 나도 누군가에게 전해야 한다.

  아버지의 임종을 맞이하던 중앙보훈병원 병실에서 상이용사를 마주하고 ‘내가 글을 쓸 줄 안다면 저들을 위로할 수 있을 텐데.’ 막연히 품었던 생각이 그냥 흘러가는 바람은 아니었다.


  720헌병대대 소속인 그와 그의 동료들의 사진을 보며 작가가 되겠다고 꿈꿔본 적이 없던 내가 낯선 책 한 권에 왜 가슴이 뭉클해지는지, 이젠 내가 작가가 된 이유를 알 것 같다. 데럴이 내게 말하고 싶은 것, 그가 내게 알리고 싶은 것을 나도 누군가에게 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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