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요하지 않는 뚝심이 변화를 이겨낸다
오랜만에 마음먹고 책상 정리를 했다. 뒤죽박죽이 된 서랍 속은 심란하다. 압정과 클립, 연필통도 가지런히 정리하고 모아두기만 했던 메모장은 서랍 맨 아래 칸으로 옮겼다. 그리고 며칠 후 무심코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메모장을 꺼내기 위해서다. 아차!
습관은 자리바꿈을 기억하지 못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은 왠지 거북하다. 껄끄럽게 느껴지면 저항이 따라온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다. 거북한 것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러워진다. 역사는 그런 과정을 거쳐 진화했다.
전기의 발견은 생활의 패턴을 바꾸어버렸다. 불이 없던 시절 얼마나 불편했던가.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는 서울이라도 외진 곳이라 전기가 들어오질 않았다. 어둠이 내리면 호롱불 유리관을 열어 심지에 불을 붙이던 외할아버지의 굼뜬 손동작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하지만 변혁의 뒤안길에는 슬픔이 웅크리고 있다. 신발이 등장하자 고무신 장수는 딴 직업을 찾아 나서고 센베이 과자를 만들던 과자공장은 폐업을 해야 하는 아픔이 생겨나는 것이다. 추운 날 찹쌀떡과 메밀묵을 외치던 소리는 추억 한 귀퉁이로 밀려나 이젠 들을 수 없는 소리가 됐다. 그것들을 즐기기에 사람들의 미각은 사치스러워졌다.
2008년 11월 4일, 역사의 기록에 한 점을 찍는 사건이 에 일어났다. 피부색 까만 흑인이 미국대통령으로 당선이 된 것이다. 그가 내세운‘변화’라는 말 한 마디에 젊은이들이 열광을 하고 전 세계인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인종적인 관점으로만 따졌을 때 흑인이 미국을 대표하는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의식의 전환이고 변화 그 자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흑인이 미국대통령이 되었다는 것만으로 흥분하는 것은 넓은 의미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함이다.
동양 사상은 음양오행으로 변화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동양철학에서의 변화는 새로움의 창조가 아니라 순환의 반복으로 해석한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변동은 분명 변화인 것은 틀림없지만 사계절이라는 관점에서는 본다면 그것 또한 주기를 갖고 반복되는 과정의 일부분이다.
서양인의 사고방식은 전혀 다르다. 변화가 오기를 관조하는 것이 아니고 변화를 의도적으로 계획하고 확장시킨다. 식민지를 얻기 위해 대륙을 찾아 나서고 해저바닥을 뒤지며 대기권 너머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것도 그들이 먼저 시작했다.
변화한다고 해서 모두에게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다. 변화를 하는 그 순간 어떤 사람은 이득을 취하지만 어떤 이는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변화를 갈망한다는 것은 변화 자체에 매력 을 느껴서라기보다는 현재의 상태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군다나 변화가 자리 잡기 위해서는 시행착오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변화는 기존의 전통을 억제해야 하기 때문에 마찰과 충돌은 어쩔 수 없다. 변화만 원하고 진통의 과정을 회피한다면 그건 모순이다.
세상은 백인이든 흑인이든 대통령 한두 사람에 의해 몰락하거나 금세 흥하지 않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경제위기가 닥쳐와도 동요하지 않는 뚝심이다.
여름이 끝났다. 이제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올 것이다.
움츠러드는 계절, 어느 구석에선 봄에 틔울 씨를 품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