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의 삶을 흉내 내는 인간들

가족관계가 무너지는 사회에서 어디에 희망을 걸어야 할지

by 권소희

동물의 세계를 찍은 다큐멘터리는 내가 즐겨보는 프로다.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동물들의 행동을 보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먹을 것을 찾아 떠도는 사자의 일가족은 비정하다 못해 쓸쓸하고 가족끼리 난교를 즐기는 하이에나의 습성은 기괴한 소리만큼이나 징그럽다.


사람도 예의가 없는 이를 가리켜 '개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표현을 쓰긴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더러 동물이라고 명하진 않는다. 사람과 동물을 구분 짓는 경계선은 명확하다. 동물 세계에서의 치열한 생존은 인간세계에선 ‘살인’이라 칭하고 강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야생의 생리는 인간세상에서는 ‘인권’이라는 문턱에 걸리기 때문이다.

동물2.jpg 사람과 동물을 구분 짓는 경계선은 명확하다

동물이 인간이 될 리도 없지만 인간은 절대로 동물처럼 살아가지 않는다. 원숭이나 늑대 따위의 무리들도 그들 나름대로 질서가 있긴 해도 인간이 논하는‘정의’와는 거리가 멀다.


사람의 관점에서 본다면 젊은 사자에게 밀려나는 늙은 사자가 애처롭겠지만 동물을 사람처럼 여기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배고픈 사자가 토끼를 잡아먹는데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든지 고래뱃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물고기들이 반항을 한다면 동물의 세계는 엉망이 될 것이다. 동물들의 세계에서는 약육강식이 힘이고 그게 순리다.


그런데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그 순리대로 살아간다면 엉망진창이 되고 만다. 절대로 살인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 규범은 있으나마나 무용지물이고 어른들 밑에 똬리를 틀고 사는 어린 아이들은 목덜미 물린 사슴처럼 불쌍하다.


유학파 신학교수이자 목사가 자신의 친딸을 구타해 죽게 했다는 기사에 할 말을 잃었다. 친아버지라서 기가차고 성직자라서 경악스럽다. 인간도 동물도 다를 바 없는 것일까.

동물3.jpg 영성의 타락은 괴물로 변하는 지름길이다

성직자의 위선을 그린 나다니엘 호손의‘주홍글씨’가 요즘 사건에 비하면 오히려 로맨틱하게 느껴진다. 옥스퍼드 대학출신의 잘생긴 목사와 정을 통해 사생아를 낳게 된 여 주인공은 가슴에 간통(adultery)의 첫 글자인“A"라는 낙인을 새기고 살아간다. 법은 그녀를 정죄했어도 그녀는 끝내 사생아의 친부를 밝히지 않고 자신이 낳은 딸과 조용히 살아간다. 그때만 해도 성직자의 성적타락은 사회적으로 아주 큰 이슈여서 그 소설로 나다니엘 호손은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부상하게 된다.

동물4.jpg 루터의 종교개혁은 결말 나지 않았다.

어쩌면 신과 인간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한다고는 하지만 성직자에게 금욕적인 삶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모순일지도 모른다. 이해심을 베풀어서가 아니라 성직자의 성적문란은 이제 진부한 소재가 될 만큼 흔한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고전시대에서는 가족은 버려서는 안 되는 가장 인간적이고 동물적인 행태로 묘사됐었다. 가족관계가 무너지는 사회에서 어디에 희망을 걸어야 할지. 이제는 종교의 타락을 넘어서 인간이 되기를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다. 영성의 타락은 괴물로 변하는 지름길이다. 우리는 인간이 짐승이 되는 접경지점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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