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자의 욕망

세상을 이롭게 하려는 노력이 기도보다 먼저다

by 권소희

한때 나는 기도에 집착했다. 기도가 영적인 호흡이라는 누군가의 정의는 내게는 지니를 불러내는 알라딘의 램프였다. 성공이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는 자의 기도는 지극히 속물적이었어도 그 시절의 나의 기도는 그게 전부였다. 뭘 달라거나, 원하는 것을 이루게 해달라는.

내게 기도는 알라딘 램프였다

뿐만 아니라‘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라는 성경구절은 아주 매력적이어서 내 대신 가난을 짊어졌다는 예수의 넉넉한 고백은 큰 위안까지 안겨주었다. 나는 부하게도, 가난하게도 말게 해달라는 어느 선지자의 기도를 인용하며 욕망의 싹을 키웠다.


어느 잡지에서 본 멋진 거실 모습을 상상하며 집을 달라고 기도했고, 돈뭉치로 두둑한 지갑을 꿈꾸며 좋은 직장을 얻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원색적인 요구는 표현의 방법만 달랐을 뿐 나이를 먹어간다고 줄어들지 않았다.


게다가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송구영신 예배는 나의 욕망이 신앙적으로 포장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헌금봉투는 얇았어도 기도제목은 빼곡하게 봉투 겉면에 채워 넣었다. 내게 기도는 물질문명에 오염된 속된 바람이었으며 환락을 꿈꾸는 몽상가의 최면에 지나지 않았다.


가롯 유다를 만나기 전까지는.

가롯 유다의 욕망과 닮은 나의 기도

가롯 유다, 불가사의한 인물이다. 예수를 죽음으로 몰고 간 캐릭터는 의문투성이다. 가롯 유다를 제자로 거둔 예수의 선택은 더 수수께끼였다. 제 발로 제사장과 군인을 찾아가 예수를 체포할 방책을 의논했던 가롯 유다가 아닌가. 오히려 예수는 꾸짖지도 않고‘네가 하려는 일을 속히 하라’며 떡 조각까지 건네는 광경은 의혹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나?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다’라는 예수의 탄식은 암호처럼 혼란스러웠다. 헤롯 왕을 피해 마구간에서 태어나야 했던 예수의 삶만큼이나 가롯 유다의 인생도 이미 비극을 품고 출생했다는 의미로 해석됐기 때문이다. 가롯 유다를 나쁜 인간이라고 몰아세울 수 없는 너무도 묘한 두 사람의 관계다.


자신에게 암시를 걸면서 꿈을 꾸면 우주가 답을 해준다는 근거 없는 이야기는 2천 년 전 예수를 팔았던 가롯 유다의 야망과 맞닿아있었다. 자살로 끝이 났던 그 위험스런 야망 말이다.

이제 나는 성공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성공에 관한 자기 계발서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점에 쏟아졌다. 아침형 인간에서부터 힐러리를 닮아가는 처세술까지 심지어는 초등학생에게까지 인생의 목표를 세우라고 부추기는 세상이다. 행복이 키워드가 되어버린 세상에 뭐가 행복이고 불행인지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이제 나는 기도 하지 않는다. 바라는 게 없으니 실망할 일도 없다. 비록 내가 성공이라는 화려한 꼭대기에 서있지 못한다 해도 타고난 그릇이려니 여긴다.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앞으로도 소원 따위를 비는 기도는 하지 않을 작정이다. 세상을 이롭게 하려는 노력이 기도보다 먼저인 것 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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