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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소희 Sep 24. 2019

내게 상처 주는 사람은 없다

편협한 세상에서 살다보니 생각의 아토피 환자가 되고 말았다.

 99센트 스토어에 갔다. 꽃구경을 다녀온 딸의 탄성을 듣고 나는 잡화가게를 찾았다. 말리부 해변 근처에 하이킹을 다녀온 딸의 수다가 바람처럼 마음을 흔들었다. 올해는 LA에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려서 산불로 시커멓게 검불만 남은 산등성이에 틈틈이 피어난 보랏빛 야생화가 장관이었다. 그 장관을 찍은 사진을 보여주는 딸의 자랑에 나도 꽃을 보고 싶었다. 조화코너에서 집안에 복을 불러온다는 해바라기 몇 송이를 집었다. 풍수에서는 조화를 집에 들이면 안 된다지만 생화는 며칠 못 가 시들테니 조화라도 집에 꽂아놓을 요량이다.


 사실 내가 99센트 스토어에 갔던 이유는 충동은 딸의 꽃구경 자랑 때문만은 아니다. 집중도 안 되고 머릿속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책을 붙잡고 있어도 글씨가 읽히지 않는 날은 무조건 쉬어야 한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는 거부하지 말고 딴 짓을 하는 거다. 집 밖으로 나가 툭 터진 공간으로 나가 하늘을 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마음이 우울해지면 가짜 꽃이라도.

 오래 전에 새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어미 새가 알을 품고 있는데 껍질이 너무 얇아 부화가 되기 전에 균열이 생겼다. 신뢰가 깨진 생태계라는 걸 모르는 새들이 오염된 물고기를 잡아먹은 탓이다. 부서진 알을 두고 둥지를 떠나는 어미 새의 날갯짓은 넓은 하늘만큼이나 공허했다.


 오염으로 인해 소리 없이 파괴되는 세상이 비단 야생뿐이랴. 사람들의 멘탈도 유리그릇처럼 약해졌다. 문명에서 살기 위해 사람들은 숲을 떠나고 바다에 쓰레기를 버렸다. 촘촘한 빌딩 숲은 검은 공기를 내뿜었다. 현대인은 깊은 호흡을 하지 않는다. 가능하면 입을 오므리고 깔짝깔짝 숨을 쉰다. 현대인의 시야는 사람들의 어깨보다 더 좁아졌다. 시계가 짧으니 너그러운 아량이 있을 리 없다.

오염된 환경 탓에 깨진 새 알들.

 원시인이 지녔을 생존본능은 퇴화된 꼬리뼈처럼 여전히 무의식에 남아있어 자그마한 자극에도 민감하다. 농담을 던져도 웃어넘기질 못한다. 농담으로 상처를 받는다면 지옥문이 저절로 열린다. 불쾌한 생각은 기쁜 생각보다 질량이 무겁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분함은 점점 커져 온몸에서 뭉글거린다. 자신을 무시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면 마음에서 알러지 반응이 일어난다.


 콧바람을 쐬고 집에 들어오니 머릿속도 드넓은 들판처럼 뻥 뚫렸다. 해바라기 조화를 손에 들고 신발을 벗다가 문득 내가 가짜 감정에 속았음을 알았다. 화가 났던 분노는 내가 만들어 낸 가짜 감정이다. 본래 화라는 감정은 실체가 없으니 화라고 할 만한 감정도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상처는 주거나 받는 게 아니고 의식이 만들어 낸 관념이다. 상처를 받았다고 하지만 상처는 받는 게 아니었다. 아무도 내게 상처를 주는 사람은 없다.


 혹, 그거였을까? 말로든 행동이든 들키고 싶지 않은 속마음을 누군가 툭 건드렸는데 예민하게 내가 반응했던 거라고. 짐승의 공격에서 살아남으려던 내 무의식이 작동됐던 것도 모르고 편협한 세상에서 살다보니 어느새 생각의 아토피 환자가 되고 말았다.


 해바라기 조화를 유리병에 담아 창턱에 꽂았다. 시들지 않은 꽃, 비록 가짜이긴 해도 노란 색이 참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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