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누런콩 Nov 05. 2021

그해 한라산

한라산은 해발 1950m로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제주도 중앙에 동서로 뻗어있는 이 산은 서울에서 가장 높은 북한산의 두 배가 넘는다. 정상에는 백록담이라는 호수가 있다. 그 이름 때문에 사슴이 뛰노는 모습이 연상된다. 그런데 백록담은 옛 선인들이 흰 사슴을 술로 담가 마신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라산에 오른 것은 2019년 4월이었다. 신경안정제를 먹기 시작한 지 6년째 되던 해다.


취업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했다. 원래는 대학원에 가고 싶었지만 포기해야 했다. 대학교 4학년이 되자마자 학부 연구생 제안을 받았다. 프로젝트 2개에 이름을 올렸고 매달 100만 원씩 받았다. 그 돈을 모아 여름엔 해외여행을 떠났다. 돌아와 보니 연구실에 사람이 늘어 있었다. 그만큼 주어지는 일은 줄어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학교에서 자꾸 돈을 줬다. 죄책감이 들었다. 교수님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큰 의의를 두는 것 같지 않았다. 서술형이던 시험문제는 객관식으로 바뀌었다. 그마저도 연구실 사람들이 채점했다. 회의가 들었다. 대학원에 진학한다면 그 연구실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았는데 그건 싫었다. 갈 곳을 잃었다는 생각에 불안했다. 자주 잠을 설쳤고 신경은 극도로 예민해졌다. 정신건강의학과에 갔다. 의사 선생님은 신경안정제를 처방해 주었다.


한 번 먹기 시작한 약은 끊기가 어려웠다.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았다. 병명은 확실치 않다고 했다. 수면제가 추가될 때도 있었고 항우울제로 대체될 때도 있었다. 병원에서 나는 ‘환자분’으로 불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그랬다. 의식적으로 약을 거부했다. 그 작은 약 한 알이 보통 사람들과 나를 구분짓는 것만 같았다. 먹어야 할 약을 먹지 않는다는 사실이 엄마를 불안하게 했다. 내가 엄마에게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 여겨졌다. 한라산을 올라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단순한 충동이었다. 반발심일 수도 있었다. ‘내 보호자는 나다.’ 나도 혼자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크게 고민하지 않고 제주행 티켓을 예매했다. 등산복 바지 하나와 등산화를 배낭에 구겨 넣고 집을 나섰다.


저녁 8시쯤 숙소에 도착했다. 그 게스트하우스에서는 매일 새벽 탐방로 입구까지 등산객들을 봉고차로 데려다준다고 했다. 백록담까지 오를 수 있는 길은 두 갈래다. 나는 짧은 길로 올라가 비교적 완만한 길로 내려오기로 했다.


새벽부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큰비는 아니었다. 탐방로 입구에는 간이매점 하나가 전부였다. 그곳에서 김밥 한 줄과 이온 음료 두 병을 사 들고 나서려는데 아주머니가 비닐로 된 우비 하나를 챙겨주셨다. 우거진 숲이니 이슬비 정도야 피할 수 있겠지 싶었지만, 애써 챙겨주신 우비로 몸을 둘둘 싸맸다. 입구부터 돌계단이 나왔다. 계단 양옆으로는 키 큰 나무들이 즐비해 있었다. 나뭇잎이 물에 젖어 풀 내음이 강하게 났다. 부지런히 발을 놀려 정오가 되기 전 산 중턱에 다다랐다. 진달래밭 대피소였다. 이온 음료 한 통을 비우고 다시 길을 나섰다. 비가 거세졌다. 정상에 올랐을 땐 짙은 안개 때문에 바닥을 어렵게 구분할 수 있었다. ‘백록담’이라고 새겨진 비석도 겨우 보였다. 김밥은 얼어있었다. 뒤집어쓴 우비를 머리끝까지 올리고 그 안에서 밥알을 씹어 삼켰다. 내려오는 길은 가팔라 밧줄을 붙잡고 몸을 뒤로 돌려야 할 때도 있었다. 다시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4시였다. 비는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한라산은 내가 도전해볼 수 있는 가장 높은 산이었다. 시도해볼 수 있는 가장 힘든 행위였다. 한 발짝 발을 디딜 때마다 마음을 다졌다. 호흡 조절이 안돼 포기하고 내려가고 싶을 때마다 속으로 ‘할 수 있다’를 되뇌었다. 9시간이 넘는 등산에도 이상하게 힘이 넘쳤다.


지금도 여전히 신경안정제를 먹는다. 그런데 이제는 그 사실에 아무렇지 않다.


숙소에서 빌린 등산 가방을 반납할 때 직원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청명한 날에 보는 백록담도 좋지만 눈 덮였을 때 모습만 못하다고 하였다. 그는 내게 “계절이 바뀌면 다시 생각날 거예요.”라고 말했다. 나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한라산을 생각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