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홍콩에 잠깐 살았던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그쪽으로 발령이 났기 때문이다. 홍콩은 내게 생경한 곳이었다. 알고 있는 거라곤 장국영, 이소룡 같은 몇몇 홍콩 스타들 뿐이었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고층빌딩에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둘러싸인 그곳은 너무나 이국적이었다. 그 정경이 썩 마음에 들었다. 나는 설레는 맘으로 출국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부모님은 먼저 가서 집을 구하고 있겠다고 했다. 아버지 회사에서는 타향살이를 위로하듯 집값을 넉넉히 대주었다고 한다. 덕분에 우리는 그 화려한 홍콩에서도 고급에 속하는 아파트에 살 수 있었다.
우리가 구한 아파트는 구룡반도에 있는 하버그린이라는 아파트였다. 아파트 단지 내에는 헬스장이며 수영장 같은 여가시설이 딸려있었다. 강남에 있는 고급아파트에 그런 시설들이 있다고 풍문으로 들어왔다. 실제로 보니 절로 입이 쩌억 벌어졌다. 아파트 일 층은 호텔 로비처럼 꾸며져 있었고 무전기를 든 경호원들이 입주민이 지날 때마다 문을 열어 주었다. 시민 속에 섞여 있는 비 시민을 걸러내기라도 하듯 단지 입구에서는 입주민에게 부여된 카드를 찍게 했다. 그 카드를 찍고 단지 내로 들어설 때마다 마치 신분 상승이라도 한 기분이었다.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 온 내게 그곳은 별천지처럼 느껴졌다.
특히나 눈에 띄었던 건 통로였다. 아파트 입구에서부터 지하철역까지 터널처럼 통로가 이어져 있었다. 통로는 지상에 붙어있지 않았다. 약 2층 높이에 있었고 양옆은 뚫려 있었으나 천장은 막혀있었다. 말끔하게 정돈된 통로에는 오염된 것이 없었다. 매일 누군가 청소를 하는 모양이었다. 지하철역은 대형 쇼핑몰과 면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버그린의 입주민들은 장을 보러 가거나 산책 삼아 쇼핑몰에 갈 때 이 쾌적한 통로를 이용할 수 있었다. 통로의 막힌 천장은 비도 햇볕도 막아주었다. 그 통로는 홍콩을 더욱 근사하고 미래지향적인 도시로 보이게 만들었다.
통로에서 내려가는 계단 끝에는 시장이 있었다. 나는 종종 먹을거리를 사러 계단을 내려가곤 했다. 계단의 폭은 꽤나 넓어 자리를 펴고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 시장에 갈 때마다 넓은 계단에 얼굴이 가무잡잡한 여성들이 돗자리를 펴고 질펀하게 앉아 있었다. 그 수는 매번 달랐다. 처음에 나는 이 복잡한 데 왜 앉아 있나 싶어 갸웃거리기도 했고 다소 불편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알고 보니 그들 중 대다수는 입주 가정부로 취직해 온 필리핀계 여성들이었다. 공휴일에는 입주가정에 있기가 불편한데 실내 어딘가 들어가긴 부담스러우니 거리에 자리를 잡은 것이었다. 그들의 피난 아닌 피난은 어떤 문화 같은 것을 형성했다고 하여 홍콩을 소개하는 책자에 등재되기도 했다.
자발적인 선택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그들은 거리로 내몰린 것이다. 온 가족이 모여 하하호호 시간을 보내는데 그 집에 있기란 얼마나 불편한 일이겠는가. 또 얼마 되지 않는 월급에 커피며 디저트며 시켜놓고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기란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이겠는가. 자리를 펴고 앉은 여성 중에 분명 하버그린에 고용된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고용된 가정에서 아이들을 돌보기도 하고 설거지며 빨래며 일상에서의 궂은일을 담당하기도 할 것이다. 아파트에 딸린 고급 시설들을 그 가닿을 수 없음에 입안의 쓴물을 삼키며 지나칠지도 모른다. 그들의 고용인은 그들이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니까.’ 하는 생각으로 스쳐 지나가는 죄책감 같은 감정은 외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이 통로가 나에게 매우 기괴하게 느껴졌다. 김동인의 <감자>에서 칠성문은 빈민촌과 부촌을 물리적으로 가로 짓는 상징으로 묘사된다. 하버그린에서의 시간이 쌓일수록 어쩐지 그 통로는 소설 속 칠성문을 떠오르게 했다. 누군가의 삶과는 결코 맞닿아 있을 수 없을 칠성문 안의 삶 그리고 통로. 사실 홍콩에서 통로는 어디에나 있었다. 특별하달 것도 없는 그 구조물에 왜인지 반발심이 일었다. 홍콩을 떠나온 지 이제 10년이 다 되어간다. 그러나 그곳에서 느꼈던 그 묘한 느낌만큼은 아직도 뇌리에 깊게 박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