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위 말하는 ‘금사빠’다. 이상형은 따로 없고 ‘삘’이 통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런데 그 삘이란 게 끊임없이 찾아온다. 성인이 되고 연애는 단 한 번밖에 해보지 못했지만, 나는 언제나 사랑에 빠져있었다. 물론 짝사랑이다. 경력으로 치면 십 년이 넘는다. 성격은 또 어찌나 급하고 대찬지. 좋아하면 무작정 티를 낸다. 그런데 고백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대부분 혼자 사랑에 빠졌다가 상대에게 여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을 접는 식이다. 그렇게 나는 몇 번을 차였다. 물론 나를 차 버린 그들은 자신이 누군가를 찼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겠지만.
회사에 다니는 거의 모든 직장인들이 CC는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나는 언제나 주변에서 사람을 찾는다. 집순이가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한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입사하고 채 십 년이 되지 않은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마음에 품었다가 실연을 당했는지 모른다. 그 당시에는 그 짝사랑이 내게 너무나 심각한 일이어서 상대에게 연인이 있다는 사실에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생각하면 기가 찰 노릇이다. 한 번은 중학교 때 사귀었던 남자 친구를 내가 너무 매몰차게 차 버린 바람에 그가 내게 저주를 건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때 액운이 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날 좋아하지 않는 저주에 빠져버린 게 아닐까. 그래서 화를 달래보고자 하는 마음에 그 애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했다. 그 애 마음이 풀어지면 내 외사랑도 쌍방이 되지 않을까 소망하면서.
나는 입이 가볍다. 여기저기 고민거리를 말하고 다니는 타입이다. 매번 그랬다. “사실 내가 호감 가는 사람이 생겼는데 …….” 하며 주저리주저리 떠든다. 상담해 주는 사람도 아는 인물이지만 시치미를 뚝 뗀다. 그 비밀스런 인물과 있었던 일, 했던 대화 내용을 곱씹으며 조언을 구한다. 어떤 대답은 듣고 싶은 그것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조언이 새겨듣고 싶지 않은 내용이다. 웬만하면 다들 포기하라고 하니까. 그러면 “알았어, 네 말대로 할게.” 하며 귓등으로 흘려버린다. 그러곤 결국에 내 맘대로 한다. 사실 답은 정해져 있지만 그래도 최대한 티 내지 않는다. 그건 대화에 있어 내 나름의 에티켓이다.
이번에는 인생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나도 이번에는 잘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꽤나 커서 평소와 달리 조심스러웠다. 연락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참고 내 할 일에 집중하고자 했다. ‘그래, 글을 쓰자.’ 그런데 아무래도 안 되는 것이다. 머릿속이 그 사람으로 가득 차 있는데 어떻게 하얀 종이 위에 다른 이야기를 풀어낼 수가 있겠는가. 그렇게 나는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카페에서 멍하니, 방안 책상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오늘 선배들이 말하기를 해보고 싶은 대로 다 해보란다. 표현하고 싶으면 해야 한단다. 억지로 참으면 나중에 후회한다고. 나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용기를 내 그에게 커피를 사달라고 했다. 아무래도 단둘이서 만나는 건 부담스러웠는지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저녁을 먹자는 반응이었다. 연락해볼까 말까 며칠을 앓다가 겨우 꺼낸 말인데 어쩐지 속이 시원하다. 이번 짝사랑의 결말은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마음에도 굳은살 같은 게 배이나 보다.
언제나 나는 연애 고수가 되어 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티브이에 나오는 칼럼니스트들처럼 연애 코칭을 능수능란하게 해주고 싶었다. 왜인지 그들은 진짜 어른처럼 보였다. 그런데 부족한 연애 경험과 집순이에 자만추 성향으로 인해 연애 고수의 꿈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도 나는 어른이 되었다. 타인의 마음은 내가 어찌할 수 없다는 것, 억지로 이은 인연은 결국 탈이 나게 된다는 것, 때로는 한 발짝 물러나는 것이 진짜 사랑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짝사랑만 하는 나라도 언젠가는 단 한 사람을 만나 세상 누구에게도 들을 수 없는 사랑 이야기를 만들어 낼 거라고 믿는다.
며칠 전엔 성 아그네스의 날이었다. 그날 로즈마리를 머리맡에 두고 자면 미래 남편의 얼굴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그날 누군가 내 꿈에 나왔다.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내 인연이 나타나긴 하나 보다. 어쩐지 안심이 되는 하루였다. 나와의 붉은 실이 맞닿아 있을 그분께. 서두르지 말고 오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