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에 차였다. 차였다고 하기에도 민망하다. 지난했던 나의 짝사랑은 강제로 종료당했다. 꽤 오랜 시간 회사 선배를 좋아했다. 어느 가을날 나는 문득 선배에게 연락을 했다. 선배는 부모님 김장을 도와주러 본가에 내려와 있다고 했다. 농담처럼 오면 먹을 것을 나누어주겠다고도 했다. 나는 선배의 본가가 있는 도시로 무작정 내려갔다. 그곳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나는 여러 가지 상상을 했다. 입석으로 표를 받아 바닥에 쪼그려 앉아있는 한 시간 동안 나는 행복했다. 기차표를 사진으로 찍어 선배에게 보냈는데 답이 없었다. 목적지에 다다를수록 불안감이 엄습했다. 한 정거장 남았을 때 선배에게 답장이 왔다. 가족들과 함께 있어 나올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알겠다며 신경 쓰지 말라고 답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무턱대고 내려올 생각을 했다는 사실과 그 한 시간 동안 들떠있던 내가 부끄러웠다. 역에 내려 커피 한 잔을 마셨다. 혹시나 선배가 마음을 바꾸어 나를 마중 나오진 않을까 작은 기대를 걸었다. 어림없었다. 다시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타는 동안 내가 느낀 감정은 비참함 그 이상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현관문으로 들어서는 나를 보자 엄마는 대번에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얼굴색이 왜 이렇게 안 좋으냐고 물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기분이 가라앉아 침대 밖으로 나오기가 싫었다. 집에선 누워만 있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몸을 일으켰다. 무작정 집 밖으로 나섰다.
내가 향한 곳은 체육관이었다. 체육관은 도보로 20분 거리에 있었다. 다리 하나를 건너야 하니 아주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그곳에선 다양한 운동을 했다. 무거운 원판을 끼운 바벨을 들어 올리기도 하고 철봉에 매달리기도 했다. 죽음의 운동이라는 버피 테스트를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정도로 해내는 날도 있었다. 한 시간의 수업이 끝나면 등이며 배, 허벅지 뒤까지 땀범벅이 되었다. 얼굴은 물론 온몸이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집에서 나올 땐 운동복에 패딩 하나를 걸친 차림이었다. 덕분에 체육관까지 오들오들 떨면서 갔지만 돌아오는 길엔 추위를 느낄 새가 없었다. 나는 체대 준비생이라도 되는 것처럼 운동에 집착했다. 집에서도 짬이 날 때면 운동을 했다.
몸을 움직이고 나면 배가 고팠다. 운동을 했으니 아무거나 먹고 싶진 않았다. 자연스럽게 깨끗하고 건강한 음식을 찾았다. 주로 닭가슴살 샐러드에 베이글 반쪽을 먹었다. 그렇게 먹으면 속이 더부룩하지 않았다. 12시가 되기 전 잠이 들었다. 아주 늦지 않게 일어났다. 그럼 또 움직였다. 나는 한동안 잘 먹고 잘 잤다. 잘 살았다.
일상엔 힘이 있었다. 차인 게 뭐 대수라고 나는 참 힘들어했다. 처음에는 나의 짝사랑도, 부끄러운 행동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회사 사람을 좋아했고 그 사람이 보고 싶어서 그의 본가가 있는 도시까지 내려갔다가 바람을 맞았다는 사실을 누군가 알아챌까 두려웠다. 수치스러움을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를 놓아버리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억지로라도 그 일이 일어나기 전처럼 먹고 자고 생활하려 하다 보니 ‘뭐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한 번쯤 바보 같을 수 있다. 혼자 좋아하고 상상하고 상대방 작은 말 한마디에 휘둘릴 수 있다. 그건 잘못이 아니다. 자기혐오에 빠질 필요도 나를 갉아먹을 필요도 없다. 그때 나는 내 마음에 충실했을 뿐이다. 시간이 지나고 받아들이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건 어쩌면 일상의 힘이었다.
3개월에 한 번씩 나는 정신건강의학과에 간다. 상담도 받고 약 처방도 받는다. 짝사랑에 실패해서 다니기 시작한 건 아니다. 꽤 오래 이름 모를 병을 앓아왔다. 상태가 아주 심각했을 땐 원인 모를 공포감에 잠을 자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의사 선생님은 상담 때마다 내게 잠은 잘 자냐고 묻는다. 많은 것을 물어보진 않는다. 그저 회사는 잘 다니냐, 생활하는 데 불편함은 없냐 물을 뿐이다. 그만큼 일상생활을 무리 없이 해내는 것에는 큰 의미가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힘들어하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조언하기를 꺼리는 편이다. 평범한 사람에겐 너무나 아무렇지 않을 일이 그 사람에겐 얼마나 힘이 드는 일이 될지 너무나도 잘 안다. 아팠을 때 나는 다른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과 사소한 일을 이야기하며 웃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내 삶은 흙먼지로 가득해서 차마 웃을 엄두조차 나지 않는데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웃을 수 있다는 게 참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래도 힘들면 일단 씻고 밖에 나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눈 딱 감고 바깥공기를 쐬며 햇볕을 받으면 생각보다 괜찮을 수 있다. 정신없이 생활하다 보면 잘 먹고 잘 자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조금씩 나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괜찮아졌다. 오늘도 나는 잘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