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마담 보바리』에서 엠마는 사랑을 ‘글로 배운’ 여자다. 의사 남편 샤를르와 단숨에 사랑에 빠진다. 샤를르와의 만남은 운명적인 게 아니었는데도 그녀는 소설 속 주인공에게 자신을 투영한다. 엠마는 곧 결혼 생활에 권태를 느낀다. 대학생이던 로돌프가 그런 그녀를 꼬여낸다. 엠마를 바보 같은 여자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로돌프가 떠나고 만나는 레옹 역시 괜찮은 남자는 아니다. 시골 촌뜨기라면 쉽게 유혹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선 엠마에게 접근한다. 엠마는 로돌프와 레옹에게서 글에서나 봤을 법한 어떤 면모를 끄집어내려고 한다. 그녀에게는 모든 순간이 극적이어야 한다. 그럴 수 있을 리 있나.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은 엠마에게서 두 남자 모두 도망간다. 재정적으로도 궁지에 몰리게 된 엠마는 결국 비소를 집어삼킨다.
한 여자의 비극적 사랑놀음으로도 볼 수 있는 이 소설이 나에겐 공포로 다가왔다. 엠마에게서 나와 비슷한 습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매체를 통해 사랑을 배우는 점이나 앞뒤 안 가리고 좀 괜찮아 보인다 싶으면 홀라당 넘어가 버리는 점에서 그랬다. 나는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해본 적 없다. 사랑의 감정을 넘겨짚고 비현실적 연애를 상상하며 꿈꾼다. 이대로 가다간 누가 나에게 조금만 다가와도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들게 될 것이다. 며칠 전 티브이에서 배우 이세영이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들으며 짝사랑을 단념했다고 하는 것을 들었다. 그 이후로 어쩐지 그 노래를 자꾸 생각하게 된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뇌까리면서 괜히 마음을 다친다. 『마담 보바리』는 두 번을 천천히 읽었다. 결말을 알면서도 속으로 계속 ‘정신 차려 이 여자야!’라고 외쳤다.
가끔은 고백이 하고 싶어진다. 밥을 먹다가, 일을 하다가 문득 “근데 저 선배 좋아해요”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다가도 자존심이 상해버린다. 나에게 아무런 관심조차 없는 사람을 이렇게나 열렬히 좋아하다니. 나는 왔다리 갔다리 혼자서 줄다리기를 해댄다. 어느 날은 말을 붙여와도 못 들은 체한다. 시큰둥하게 반응한다. 마음이 변하는 날이면 대답도 없는 사람에게 질문 폭격을 한다. 이렇게 말하니 무슨 양극성 장애가 있는 사람 같기도 한데……. 그래도 일관적인 건 내가 질척거린다는 사실이다. 정신 차려 이 여자야! 어쩌면 그건 나 자신을 향한 말이다.
명동 성당엘 가야 한다. 아끼는 옷을 꺼내 입고 곱게 화장도 해서 청년 미사에 참여해야 한다. 이 교착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선 새로운 사람들과 만날 필요가 있다. 며칠 전 연락이 끊겼던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되면서 내 대운이 바뀌고 있다는 걸 느꼈다. 천주교인이 이렇게 말하는 건 좀 이상하지만, 원숭이띠 날삼재가 올해로 끝난다고 한다. 교통사고도 두 번이나 났던 한 해였다. 내년엔 즐겁고 새로운 일들이 가득하면 좋겠다.
사랑을 글로 배우면 좀 어떤가. 어차피 비소는 구할 수도 없다. (내가 쉽게 죽을 일은 없으니 행여나 염려 말길.) 『마담 보바리』는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19세기에 만연한 낭만주의를 비판하면서 쓴 사실주의 소설이라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있었던 불륜 사건을 취재해 글로 녹여낸 것이라고 한다. 대학교 4학년 때 들은 교양 수업에서 이 소설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신문 기사의 헤드라인headline은 간결하게 팩트fact만 나열하지만 소설은 그 이면을 보게 한다고 했다. 타인의 삶을 판단하는 것을 유보하게 하는 게 소설이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문학사조나 이론에 대해선 잘 모른다. 그래서 책도 내 마음대로 읽었다. 엠마는 샤를르를, 로돌프나 레옹을 사랑했을까? 아닌 것 같다. 엠마가 사랑한 건 ‘사랑’이라는 행위 그 자체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