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종 신촌엘 간다. 글쓰기 수업을 듣기 위해서다. 작년 여름 이맘때였다. 나는 또 인터넷을 뒤적거리며 열리는 강좌를 찾고 있었다. ‘에세이 쓰기’ 수업이 눈에 들어왔다. 선생님은 소설가라고 했다. 소설가가 가르치는 에세이라니, 궁금했다.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소설가를 동경해왔다. 글을 쓰고는 싶었지만 이야기를 짓는 건 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소설을 쓰는 사람은 어쩐지 내가 닿을 수 없는 그곳에 있는 사람들 같았다. 선생님이 소설가라는 이유만으로 수업에 대한 막연한 호감이 생겼다. 듣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거리두기가 한창이던 시절 드물게 대면으로 하는 수업이었다. 콧구멍에 바람이나 쐴까 하여 수업을 신청했다. 신촌의 어느 대로변에 있는 8층짜리 건물에서 강의실은 702호였다.
수업은 매주 화요일 열한 시부터 두 시간씩이었다. 수업 때마다 한 편의 글을 써 가야 했다. 강의실에 들어서면 맨 앞자리에 종이 뭉치가 놓여있었다. 글쓰기 이론이 적혀있는 종이 탑 옆에 이미 강의실에 도착한 학생들의 과제물이 쌓여있었다. 아래층에서 프린트해 온 내 과제물도 책상 위에 올려놓고서는 다른 사람들의 에세이가 적힌 종이를 한 장씩 집어 들었다. 나는 항상 맨 오른쪽 두 번째 줄에 앉았다. 어쩌다 보니 고정석처럼 굳혀졌다. 선생님은 교실에 들어서며 수강생들에게 그간의 안부를 가볍게 물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 그런지 반응은 늘 썰렁했다. 그러면 선생님은 글을 쓰는 사람 중에 내향적인 사람이 많으니 이해한다며 본론으로 들어가시곤 했다. 이론 설명은 한 시간 가량 이어졌다. 나머지 한 시간 동안에는 서로가 써온 글을 읽었다. 남들 앞에서 무언가를 소리 내어 읽는 게 참 오랜만이었다. 가끔은 내 내밀한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기도 했다.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속내를 털어놓는다는 게 처음에는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이미 돈을 냈으니 중간에 포기하지만 말자는 생각으로 글을 적었다. 매주 한 편의 글을 짓는다는 것은 꽤나 부지런해야 하는 일이었다. 머릿속에 계속 글감을 떠올려야 했다. 호기롭게 시작한 글을 마무리 짓기가 어려웠다. 매주 끝맺음으로 고통받다가 결국엔 흐지부지 끝내버리고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8주 동안 단 한 번 과제 제출에 실패한 것 빼고는 나름의 쾌거였다.
수강생은 총 일곱 명이었다. 모두가 매주 참석하진 못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창일 때라 띄엄띄엄 앉아 서로가 낭독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누구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누구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했다. 그러고도 우리는 8주 동안 대화 한 번 나누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면 말없이 흩어졌다. 그렇게 마지막을 맞이하려니 다들 아쉬웠는지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7층에서 1층까지 내려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는 밥 한 끼라도 같이 하고 마무리하자고 입을 모았다. 선생님이 데리고 가려고 했던 밥집이 문을 닫는 바람에 식사는 못 했지만 서로의 번호를 교환하며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엘리베이터 안에 다섯 명이 있었다. 선생님을 빼고는 여자 네 명이었다. 그중 나는 제일 어렸다. 나는 ‘설마 진짜로 모이겠어.’ 하는 마음으로 연락처를 받았다. 처음 모이자고 할 때도 ‘한 번 뿐이겠지.’라는 생각이었다. 또래도 있었고 엄마뻘도 있었다. 당시 나는 만으로 20대였으니 20대, 30대, 40대, 50대 한 명씩이었다. 우리 네 명은 선생님 없이도 글을 써보자고 했다. 수업에서 하던 대로 매주 한 편의 글을 쓰는 대신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낭독을 하자고 했다. 누군가의 지도 없이 그렇게 써내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글쓰기를 자꾸 미루게 됐다. 책상 앞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한 달 만에 처음 모이기로 한 전날 밤, 나는 A4 용지 반도 채우지 못한 글을 꾸역꾸역 썼다. 예의상 뭐라도 적어내야 할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 모임은 참여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하기로 마음먹고 신촌 어느 프랜차이즈 카페로 향했다.
막상 사람들 얼굴을 보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날림으로 적은 그 짧을 글을 읽으며 그동안 쓰지 못한 핑곗거리를 댔다. 다행히 나뿐만이 아니었다. 수업이 끝나자 다들 마음이 해이해졌다고 했다. 낭독은 잠깐이었다. 오랜 시간 우리는 쓰기의 고충을 토로했다. 힘든 건 나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어쩐지 위안을 얻었다. 그렇다고 열정이 샘솟진 않았다. 나는 빠지겠다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하고 몇 달을 보냈다. 뭐든지 시큰둥한 내 반응에 힘이 빠졌을 법도 하지만 사람들은 내색하지 않았다. 나를 비난하거나 채찍질하지도, 내게 무언가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마음의 부담이 덜어졌다.
우리는 적은 글을 네이버 밴드에 올리기로 했다. 글이 써지지 않으면 그냥 ‘글이 안 써진다.’라고 적어서 올리자고 했다.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 말자는 게 취지였다. 사람들이 글을 올리면 조바심이 들었다. 눈치가 보이기도 했다. 큰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닌데 점점 게시물을 올리는 빈도가 늘어났다. 청개구리 심보일까. 아무도 구속하지 않으니 무언가라도 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언젠가 나는 일어나자마자 공책 세 장에 아무렇게나 휘갈겨 쓰는 ‘모닝 페이지’를 시작했다. 사람들은 내 글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했다. 마치 혼자만의 동굴에서 나와 햇빛을 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그건 누군가를 견제하거나 시기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우리는 조건 없이 서로를 응원해 주었다. 서로에게 용기를 심어주었다. 나는 그 모임이 좋아졌다.
서로를 본체만체하며 지냈던 지난여름을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다. 그 사람들에게 내 짝사랑 이야기를 터놓았다. 어른들의 조언이 필요하다 싶을 땐 어김없이 찾게 되는 사람들이다. 702호에서 시작된 만남은 어느덧 일 년이 다 되어간다. 언제까지 이렇게 모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서로의 삶이 있으니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모임의 끝을 상상하면 벌써 아쉬워진다. 나이도, 사는 환경도, 놓인 처지도 달랐던 우리는 어느새 친구가 되었다. 2주 뒤엔 몇 번째일지 모를 우리의 모임이 있다. 그때 또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