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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 Nov 27. 2020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기'는 이제 그만!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결혼하기 전까지는 음식이란 걸 전혀 할 줄 몰랐다. 다소 가부장적인 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K-장녀인데도 대부분 부엌살림은 엄마가 했고 커서도 요리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 그게 좀 이상한 오기에서 비롯된 건데, ‘남자들이 부엌에 들어가지 않겠다면 나도 들어가지 않겠다’라는... 생각하니 좀 부끄럽다.

엄마 심부름 몇 번을 끝으로, 그나마도 중학교 때부터는 공부한다는 핑계로, 우정을 다져야 한다는 구실로, 아예 그쪽으로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고 그건 대학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자취를 한 적도 없고 회사생활을 하면서도 엄마가 해주는 밥을 꼬박 챙겨먹고 다녔으니 결혼 전까지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게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그러니 신혼에 혼자 밥상을 차리는 일은 불가능한 미션에 가까웠다. 스텐팬을 쓰는 것도 아닌데 달걀 프라이 하나 하는 게 쉽지 않았다. 밥물을 맞추는 정도는 할 줄 알았지만 정말 그것뿐이었다. 전기밥솥이 있으니 밥은 해결이 되는데 국이니 반찬이니 하는 건 생각도 못했다. 햄을 구워먹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정도로 며칠이나 버틸 수 있겠는가. 다행히 내가 신혼생활을 할 때는 파워 블로거들이 레시피를 올려주는 수고를 해준 덕택에 음식을 할 때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거는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되었다. 밥은 챙겨먹고 있는지, 아침은 먹고 다니는지 걱정했던 엄마는 왜 한 번도 밥 차리는 일 때문에 전화를 걸어오지 않느냐고 서운해 했다. 나는 광고 카피처럼 말했다. 네이버가 있잖아.     


인터넷 검색이라는 유용한 수단에도 불구하고 요리 실력이라는 게 간단히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레시피 대로 했어도 맛은 별로인 경우가 다반사였고, 하다 보면 레시피 대로 하는 게 갑자기 귀찮아질 때가 있었다. 그런 경우는 대개 국물이 한강이 되고, 나물은 물컹한 식감에, 고기 바깥은 타고 안은 덜 익기가 일쑤였다. 아무리 훌륭한 레시피라도 가정마다 불의 세기와 익히는 시간에 따라 결과는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남들은 눈대중만으로도 척척 하던데. 할 때마다 무슨 양념이 몇 숟가락 들어가야 하는지 화면을 들여다보는 것도 요리를 더 어렵게, 지루하게 만드는 요소였다. 경험 부족에 태생적으로 결여된 요리 DNA. 남편이 아침을 안 먹는 습관이 있는데다가 주는 대로 군말 없이 먹는 스타일인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삼계탕 한답시고 닭하고 씨름하면서 먹기도 전에 땀인지 눈물(당시에 채식 중이었다는)인지를 한 바가지 흘리고 있을 때 본인이 나서서 해보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안 했다는 점은 함정이지만.     

그래도 세월은 가고 다행히 10년을 허송세월한 것은 아니었나 보다. 이제는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도 한 상 차림 정도는 해낼 수 있게 되었다. 매일 해내는 밥상이라 메뉴가 다양하지는 않더라도 그나마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반찬을 해내고, 먹을 만하게 할 줄 아는 요리도 한두 가지는 있다. 수많은 검색질과 실전에서의 삽질의 결과라고나 할까. 그러나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남편의 요리 실력은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으니 예정된 결과지만 결코 당연한 건 아니다.


산후조리를 위해 집에 있을 때에도 내 밥상을 책임져준 것은 친정 엄마였다. 시가에서도 여성들만 도왔다. 웃픈 사실은 친정 엄마의 밥상을 받는 사람에는 남편도 포함돼 있었다는 거다. 암 수술로 병원에 입원한 기간 동안은 물론이고 퇴원한 후에도 림프부종 우려가 있으니 집안일을 하지 말라고 했다. 수술 기간 동안 남편이 안식월을 신청해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았지만 그뿐이었다. 친정과 시가에서 해다 주는 반찬이 없었으면 아마 아이들은 사다 먹는 음식만 먹었을 지도 모르겠다. 한두 번 인터넷에서 레시피를 검색해 요리를 하긴 했지만 몇 번 하다 말았다. 앓느니 죽는다더니. 수술 후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어느새 주방에서 일을 하고 있는 스스로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림프부종이 나를 비켜가도록 비는 것 밖에는 없었다.     


재건수술 후에는 당연한 듯이 주방일은 내 차지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도, 여러 가지 일을 겪었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왜 그 무수한 세월 동안 남편은 요리를 직접 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몇 번의 설거지와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정도로 해야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건 대체 무슨 경우인가. 이렇게 가정을 해보았다. 만약 내가 요리를 하지 않으면 남편은 아마 몇 끼는 라면으로 때울 것이고, 정 안 되면 음식을 사다먹을 지언정 요리를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요리는 본인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명절 때에 시가나 친정에서 남자들이 나란히 앉아서 TV를 보고 있는 장면은 이제 놀랍지도 않다. 한 번은 엄마를 비롯해 여자들이 밥상을 차려내는 동안 아빠를 비롯해서 아들들과 사위가 주루룩 앉아서 말 한 마디 없이 뭐 대단한 거라도 보고 있는 것처럼 TV를 시청하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다. 참내. 나이든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을 앉아서 받아먹고 싶을까. 몰랐던 것도 아니고 처음 보는 광경도 아니었지만 썩소가 절로 나왔다.


친정 아빠의 경우는 요리를 좀 할 줄 아는 편이다. 엄마가 집을 비울 때면 아빠가 요리를 해서 밥을 차려줬다. 엄마는 아빠랑 다투고 난 후 밥을 안 차려줘도 눈 하나 꿈쩍 않는 아빠가 얄밉다고 했다. 오히려 더 맛나게 해 먹는다며. 개인적으로 스스로 음식을 하고 밥을 차려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어른의 증표라고 생각한다. 음식의 맛하고는 별개로 다른 사람에게 밥상을 차려주는 일은 때로는 숭고해 보이기까지 한다. 힘들고 지쳤을 때 나를 위한 밥상을 받으면 정말 위로가 될 것 같다. 그래서 아이들이 아직 초등학생이지만 음식 하는 법을 조금씩 가르치고 있다. TV 드라마처럼 아내가 집을 비웠다고, 엄마가 집에 없다고 굶고 있는 사람이 되지는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내가 없을 때 남편이 잔치상처럼 거하게, 한상 잘 차려먹어도 나는 절대 화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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