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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 Jun 14. 2021

당신의 외로움+나의 고독=?

세상만사가 이분법으로 나뉘는 것은 결코 아닐 테지만 한번쯤 이런 상상을 해보게 된다. 만약 선택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면, 나는 내 얘기를 주로 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내 얘기만 빼고 모든 얘기가 가능한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 어쩌면 나만 하는 상상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상당히 중요한 질문이었던 것이, 한참 전에 그런 선택의 기로에 서야 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택은 다양한 자극과 반응이 일으킨 결과물이다. 이 경우를 예로 들면, 내 속에 있는 얘기를 어렵게 꺼내놓았을 때의 경험이 비참했기 때문에 ‘다시는 내 얘기를 꺼내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을 수도 있겠고, 타고나길 그리 태어난 탓도 있었을 수 있고, 다른 선택, 그러니까 내 얘기만 빼고 다른 모든 것에 대해 최소 30분 이상 얘기할 수 있는 재주가 있었기에 자연퇴화된 특성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 이건 경험에 기반한 내 얘기다. 신비주의나 뭐 그런 건 아니고, 타고나길 그렇게 타고났고, 직업적인 특성도 있어서 다른 사람 얘기를 끌어낼 필요성이 좀 있었더랬다. 그러니 나란 사람에게, 더구나 이렇게 나이까지 들어버린 내가 속 얘기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때로는 불필요하기까지 한 일이겠는가.

자라면서 친구들에게 ‘너는 왜 니 얘기를 안 해?’라는 질문을 받으며 살았다. 이십 년 이상 본 친구들조차 내 속을 모르겠다는 푸념을 들으며 ‘그러게. 나는 왜 내 얘기를 안 하지’ 생각한 적이 여러 번. 내 얘길 하면서 내가 약해진다는 느낌을 받았고, 감정을 통제할 수 없는 그 순간이 좋았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지나고 보니 다 ‘별일은 아니더라’ 하는 특유의 냉정한 판단 때문일 수도 있고.     


그런데 브런치에는 ‘나’라는 사람을 주제로 글을 쓰고 있다. 야심차게 매일 쓰리라 다짐했지만 매일은커녕 두 달 가까이 브런치 포스팅을 안 한 적도 있으니. ‘나’를 주제로, 내 생각을 풀어내는 것이 얼마나 스스로를 갉아먹는 일인지 실감하고 있다고 할까. 다른 작가들은 이런 느낌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좋게 말하면 그렇고. 한 마디로 내 얘기를 쓰는 게 너무 힘들어서 아예 안 쓰지 말자고 방향을 틀었다고 해야 할까. 지난 4월부터 내가 쭉 그런 상태다.     


이와 관련해 글쓰기에 관한 책을 보면 여러 가지 해설과 해답을 얻을 수는 있다. 그러나 지금껏 위안은 전혀 안 됐다. 그러니 앞으로 에세이 글을 쓰려면 이 부분은 포기하고 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이 현재로서 내 결론이다.

그동안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써왔다. 어떤 면에서는 병을 얻게 됨으로 인해 내 얘기를 한다는 게 좀 가능해지나 싶었는데 2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 약발이 다했다고 해야 할까. 만사를 긍정하던 습관도 증발돼 버렸고, 3일은 괜찮다가 4일은 우울한 예전의 나로 돌아왔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글쓰기가 가능한 상태도 아니다. 이게 신기한 게 일로 하는 글쓰기는 그럭저럭 하고 있는데, 나와 내 일상을 주제로 하는 글쓰기만 안 된다. 아니면 이건 마감이 있는 일이 아니니 단순히 게으름의 발현인데 합리화를 주구장창 늘어놓고 있는 것일 수도.


글쓰기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하는 행위이다. 혹은 지금은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훗날 독자가 될 수도 있는 누군가에게 하는 행위이다. 너무 민감하고 개인적이고 흐릿해서 평소에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말하는 것조차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를, 가끔은 큰소리로 말해 보려 노력해 보기도 하지만, 입안에서만 우물거리던 그것을, 다른 이의 귀에 닿지 못했던 그 말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적어서 보여줄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글쓰기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침묵으로 말을 걸고, 그 이야기는 고독한 독서를 통해 목소리를 되찾고 울려 퍼진다. 그건 글쓰기를 통해 공유되는 고독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눈앞의 인간관계보다는 깊은 어딘가에서 홀로 지내는 것 아닐까? 그것이 둘만으로 구성된 관계일지라도. 말이 전하기에 실패한 것을 글이, 아주 길고 섬세하게 전할 수 있는 것 아닐까?
p. 100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에서도 글쓰기에 대한 장이 있어 선택지를 하나 얻을 수 있다. 그의 말처럼 가족에게도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나는 브런치를 통해 하려고 했고, 해오고 있다. 지금까지 결과가 성공적이라고 할 수는 절대 없겠지만 솔닛의 말에서 희망을 찾아본다.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주변의 누구에게도 나눌 수 없는 이야기를 브런치라는 플랫폼을 통해 하고 있고, 소수이긴 하지만 같은 경험을 가진 이들에게 피드백을 받았고, 그 경험이 꽤나 신선하고 좋았다고 말할 수 있어 기쁘다.

글을 쓰는 일은 참으로 고독한 일이다. 작가들의 글쓰기 책에 보면 반드시 나오는 이야기 중 하나이고 내가 요즘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고독과 역마의 기질을 동시에 갖고 있는 나란 인간에게 꽤나 가혹한 인내심을 요하는 일임에 분명하나, 그것이 비단 나뿐이겠는가. 솔닛의 말처럼 그것은 ‘공유되는 고독’이니까 적어도 외롭다는 생각은 덜 수 있으리라. 살아오면서 실체가 있는 인간에게는 실패했던 시도가 글쓰기를 통해 보다 섬세하게, 그리고 찬찬히 전달되어 빛나기를. 글쓰기와 읽기라는 행위를 통해 우리가 앓는 외로움이 조금은 견딜만한 일이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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