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위에 먼지가 뽀얗게 쌓였다. 손바닥으로 스윽 훔쳐냈더니 맨들한 살이 까끌까끌해졌다. 몇 달 동안 연필을 들지 않았다. 글쓰기에 질린 건 아니었다. 푹푹 찌던 지난여름 어느 날 나는 친구와 함께 마곡 어느 테니스장으로 향했다. 일일 체험권을 끊었다. 첫 수업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우리는 근처 밥집에서 국수를 먹으며 이것저것 따져보았다. 운동을 하긴 해야 하는데. 같이 할 수 있는 운동이면 좋겠다. 레슨비가 비싸긴 하지만 둘이면 하나보단 나으니깐. 결국 한번 배워보자는 결론이 났다. 교대 근무를 하는 우리는 어렵게 시간을 맞추어 레슨을 받았다.
때마침 테니스 열풍이 불었다. 회사에도 테니스 치는 사람이 늘어났다. 다들 삼삼오오 모여 코트를 빌렸다. 나도 몇 번은 끼어 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도, 회사 선배도 테니스에 푹 빠져있었다. 나는 운동 자체보다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좋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테니스에는 그다지 흥미가 가지 않았다. 친구와 같이 수업을 듣는 건 한 달이 지나고 그만두었다. 집까지의 거리가 멀기도 했고 시간 맞추기가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 레슨을 받고 가끔 만나 같이 운동하자고 했다. 나는 더 이상 테니스를 배우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결국 나는 다음 달 수업료를 지불했다.
그러고 보면 테니스뿐만이 아니었다. 좋아하지 않는 데도 좋아한다고 했던 것들 말이다. 나는 얼굴에 무언가를 얹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메이크업 같은 것 말이다. 로션에 선크림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낀다. 그런데도 대학 시절을 돌이켜 보면 나는 항상 얼굴에 무언가를 찍어 바르고 있었다. 진하게 화장한 날이면 일 층 엘리베이터 앞 거울 속 비친 내 모습에 비참함을 느끼기도 했다. 나는 단지 친구들과 다르고 싶지 않기 때문에 화장을 했다. 기미와 잡티가 끼고 햇볕에 그을려 가무잡잡해진 내 얼굴을 좋아하는데도 그렇다고 말하지 못했다. 대신에 두꺼운 파운데이션으로 얼굴을 가렸다.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는 데는 큰 에너지가 필요했다. 입사하고 얼마 되지 않아 나는 화장을 벗었다. 처음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채로 출근했을 때 나는 스스로 위축되었다.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닌데 그랬다. 이제야 밝히지만 나는 아이돌에 관심이 없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그랬다. 우리 시절 유명했던 ‘동방신기’나 ‘빅뱅’ 같은 아이돌 가수는 좋아해 본 적도, 영상을 찾아본 적도 없다. 그런데 가끔 덕질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내가 그런 데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굳이 밝히지 않는다. 괜히 나서서 산통을 깨고 싶지 않다. 나를 다른 어떤 이질적인 존재로 느끼게 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좋아하는 것, 좋아하지 않는 것을 밝히지 못하는 내가 답답할 때도 있다. 가끔은 금전적인 손해를 보기도 한다. 테니스 레슨비는 내 한 달 생활비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의 거금이다. 나는 단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히기가 힘들어 그 큰돈을 소비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해 손해를 보고 온 날이면 나 자신이 한심하다고 느낀다. 그러면서도 말하기를 두려워한다. 단지 싫다고 내뱉으면 그만인데도 말이다.
<프렌즈>에서 주인공이 헬스장 회원권을 끊고 그만두겠다고 말하지 못해 끙끙대는 에피소드가 있다. 웃기기도 했지만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그 마음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 것 같다. 이번 달을 마지막으로 나는 테니스 레슨을 그만둘 수 있을까. 과연 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내 친구에게, 회사 선배에게 사실 나는 테니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주의 기운이 모여 내게 용기를 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