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가기 전엔 합정동에 살았다. 우리 집은 17평 작은 집이었다. 우리 가족만 해도 네 명이었는데 사촌 언니들까지 부산에서 올라와 같이 살았다. 우리 집은 3층이었다. 아래층은 PC방에 1층은 갈빗집이었다. 식당에서는 바퀴벌레가 올라왔다. 아빠는 휴지를 둘둘 말아 벌레를 잡고선 우리에게 ‘훠이’ 하며 겁을 주곤 했다. 벌레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아빠밖에 없었다. 엄마는 집을 비울 때마다 연막탄을 피웠다. 명절에 시골을 갔다 오면 집 안에 벌레 사체가 나뒹굴었다. 끔찍했다. 건물 지하엔 노래방이 있었다. 엄마는 2층이나 지하엔 얼씬도 못 하게 했다.
그보다 더 어릴 땐 망원동에 살았다. 망원동 집은 주택이 몰려있던 골목 2층에 있는 집이었다. 엄마는 나를 망원동이 아닌 합정동에 있는 성산 초등학교로 유학 보냈다. 그 학교엔 서교동에 사는 아이들도 다닌다고 했다. 밤이 되면 골목에 사는 또래 아이들이 모여 고무줄이나 수건돌리기 같은 놀이를 했다. 그땐 꼭 교가를 불렀는데 나는 따라 부를 수 없어 입만 벙긋거렸다. 혼자만 합정동에 있는 학교에 다니다 보니 교가가 달랐던 것이다.
내가 살던 때만 해도 망원동은 유명한 동네가 아니었다. 오히려 후미진 축에 속했다. 우리는 돈을 모아 망원동에서 합정동으로 이사 간 것이었다. 엄마는 중국에 사는 4년 동안 열심히 돈을 모았다며 망원동 집은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나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땐 당연히 그 동네로 갈 줄 알았다. 그런데 우리가 없는 사이 망원동은 말 그대로 ‘핫 플레이스’가 되어버렸고 집값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올라버렸다. 결국 우리는 다른 동네에 살 곳을 구해야 했다.
지금 동네로 이사 오고서도 한동안은 망원동을 잊지 못했다. 우리에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은 망원 시장에서 파는 왕만두였다. 기가 막히게 머리를 잘 만지는 곳은 시장 앞 골목에 자리한 미용실이었다. 그곳만큼 손이 빠르고 내 마음에 들게 머리를 만져주는 곳이 없었다. 아빠가 계실 적엔 망원동에 꽤 자주 갔다. 비빔국수에 콩가루가 들어갔다는 이유로 그 동네를 찾아갔다. 아빠는 꼭 테니스는 고수부지 테니스장에서 쳐야 맛이 난다며 바리바리 짐을 싸 들고 그곳으로 갔다. 엄마는 대구 토박이에다 아빠는 무주 산골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자랐지만 망원동이 고향인 사람들처럼 그곳을 그리워했다.
망원동이 매스컴에 뜨고 나서는 발길을 끊었다. 우리가 추억하던 곳이 다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며칠 전 오랜만에 망원동에서 친구를 만났다. 합정역 8번 출구에서 나와 내가 좋아하던 국숫집으로 향했다. 지도 앱은 켜지 않았다. 그저 발이 기억하는 대로 걸음을 밟으니 어느새 가게 앞이었다. 친구는 ‘망원동은 내 나와바리지만 이 길은 처음’이라며 신기해했다. 어릴 때 살던 골목엔 아기자기한 소품샵이 들어서 있었다. 내가 다니던 피아노 학원이나 골목 앞 유일했던 횟집은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다행인지 엄마가 일하던 마트만은 이름만 바뀐 채로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저기 있는 하나로 마트가 나 어릴 적엔 코스코 마트였다고 친구에게 말해주었다.
지금 집이 좋긴 하지만 옛날 집과는 다른 느낌이다. 나는 그 옛날 합정동 집 싱크대 밑에서 바퀴벌레와 눈이 마주치진 않을까 두려워했었다. 가끔은 계단에 토사물이 있었고 나는 그걸 밟지 않으려고 발끝을 세우고 두세 칸씩 계단을 올라가기도 했다. 지금 집은 그에 비해 넓고 쾌적하고 편안하다. 그래도 여전히 내 꿈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건 옛날 집이다. 우리가 뛰어다니던 골목을 이제는 ‘망리단길’이라고 부른다. 그 변화가 신기하면서도 나는 괜히 무언가를 빼앗긴 기분에 억울해진다. 동네가 너무 빠르게 발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걸음만큼 느리게 앞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