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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런콩 Sep 05. 2023

마녀 수프

마녀 수프는 각종 야채를 물에 넣고 푹 끓인 수프다. 아무런 간을 하지 않고 끓이면 소위 말하는 ‘원효대사 해골 물’ 맛이 난다고도 하여 악명이 높다. 마녀 수프가 다이어트에 좋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 여자들 사이에서 ‘밥 대신 마녀 수프 먹기’가 유행했었다. 우리 엄마도 덩달아 그 야채 끓인 물을 끼니 대신 먹곤 했다. 역한 모양새에 물컹한 야채가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니 비위가 상했다. 나는 엄마가 나에게 수프를 권할 때마다 “그딴 거 엄마나 먹어”라며 막말을 쏟아내곤 했다.    

  

나이가 들고 보니 야채가 당긴다. 야채를 충분히 섭취해주지 않으면 갈증마저 생기는 것 같다. 게다가 뜨끈하게 속을 데울 수 있는 음식이라면 환장이다. 마다할 이유가 없다. 어느 날 마녀 수프가 생각났다. 토마토를 잔뜩 넣고 충분히 간을 하면 먹을만할 것 같았다. 며칠 동안 마녀 수프를 끓여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유튜브에 ‘마녀 수프 끓이는 법’을 검색했다. 카레 가루를 넣으라는 사람도 있었고 치킨스톡이나 토마토소스를 넣으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건 아무래도 내키지 않아서 찾아보던 중 마녀 수프를 먹고 7킬로를 뺐다는 어느 유튜버의 영상을 보았다. 바질 가루와 월계수 잎, 소금 후추 말고는 따로 넣는 게 없어서 마음에 들었다. ‘이거다.’ 그 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보며 레시피를 익혔다. 마녀 수프를 만들고 싶어 몸이 달아 있었다.      

오늘은 아침에 퇴근했다. 야간 근무 동안 커피를 4잔이나 마셔 그런지 퇴근길에도 쌩쌩했다. 그런 줄 알았다. 지하철 안에서 요즘 읽고 있는 『논바이너리 마더』를 마저 읽으려는데 나도 모르게 깜빡 졸았다. 아무래도 바로 수프를 끓이는 건 무리일 것 같았다. 세 시간쯤 자고 나서 나는 장을 보러 나갔다. ‘바질 가루를 어디서 사지?’ 생각하다가 밑져야 본전이겠다 싶어 집 앞 슈퍼에 들렀다. 바질 가루가 있었다. 홈플러스가 있는 역까지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토마토 4개와 브로콜리 2개, 당근과 양배추, 파프리카를 샀다. 토마토가 많이 들어갈수록 맛있다고 하여 넉넉히 샀다. 소고기는 넣지 않으려고 했는데 야채만 넣으면 이상한 맛이 날까 봐 겁이 났다. 국거리용 소고기도 바구니에 담았다. 야채는 얼마 산 것 같지도 않은데 4만 원이 나왔다. ‘4만 원짜리 야채수프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생각했다.      


야채 손질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집에 있던 양파까지 큼직하게 썰어 넣으니 커다란 냄비가 가득 찼다. 물 1리터와 버터를 조금 넣었다. 소금 후추는 끓이면서 넣기로 했다. 누구는 소고기를 버터에 먼저 볶은 후 야채를 넣는다지만 그다지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나는 그냥 한꺼번에 다 때려 넣었다. 냄비 가득 담긴 야채가 뭉근해질 때까지 끓였다. 소금 후추로 간을 하고 맛을 보았는데 환상적이었다. 보양식이 따로 없었다. 내가 호들갑을 떨면서 엄마한테 한 번만 먹어보라고 하니 엄마는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왔다. 엄마가 와하고 감탄했다. 수프가 다 끓고 우리는 대접에 한 사발씩 담아 먹었다. 뜨끈한 수프에 몸이 데워지면서 속이 든든해졌다. 땀을 뻘뻘 흘리며 그 많은 걸 다 먹었다.      


학교가 끝나고 막내가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또 맛있는 걸 만들어놨다며 소란을 피웠다. 막내는 시큰둥하게 반응하며 조그마한 접시에 수프를 떴다. “괜찮네. 특이한 맛이야.” 아직 어린 막내 입맛엔 안 맞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한 입 먹고 갖다 버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막내가 커서 언니가 끓여주던 그 야채수프가 가끔 생각나더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자주 끓여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건강해진 기분이 들었다. 점심을 든든하게 먹고 나는 노곤해져서 낮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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