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네시의 92세 소녀, 키티
난 정말 잘 울지 않는 편인데 오늘 정말 펑펑 울었다. 사실 지금도 울고 있다. 이 눈물의 이유가 뭔지 나도 아직 잘 모르겠다. 그래서 이 감정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분명한 것은 어떤 한 사람의 인생이 내게 얼마나 큰 감동을 주는지 제대로 느꼈던 것이다.
요즘 개인적으로 사랑과 결혼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캐서린 할머니의 어머니, 캐서린(키티)의 스토리는 너무 아름다웠다. 물론 이 미국 남부 시골의 배경 또한 너무 아름다워서 어떤 감상적인 분위기에 휩싸인 것 같기도 했으나 다시 생각해보면 키티 할머니의 삶과 그 가족의 역사 자체에서 오는 감동이 더 컸던 것 같다.
단지 미국 남부 로드트립의 한 에피소드 정도가 아니라 한 여성의 삶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돌아볼 수 있었던 매우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아들 둘, 딸 셋, 총 다섯 명의 자녀들을 길러낸 뒤 한 명의 아들을 잃은 게 우리 외할머니와도 닮아 있었다. 하지만 한 남편과 처음부터 오랫동안 아름다운 결혼 생활을 했으며 ‘일평생 당신만을 사랑했다’는 달콤한 고백을 그가 눈 감는 순간에 들었다는 점은 우리 외할머니와 다른 점이긴 하다.
그 러브스토리 때문에 지금도 침대 맡에 놓인 남편의 사진이 그렇게 내 마음을 아리게 했던 것 같다. 타락하고 썩어질대로 썩어문드러진 이 세상에서 일편단심의 사랑 같은 게 이 세상에 존재하냐고 묻고 싶을 때마다 키티 할머니를 생각할 것이다. 그 증거를 남기고 싶었다.
아마 그런 남편의 사랑을 오랜 세월 받음으로 인해서 90대의 나이에도 여전히 아름답고 사랑스러울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비록 남편이 뇌종양을 발견한 뒤 10일 뒤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평생 자신 한 사람만을 사랑했음을 알 때 90대의 나이에도 소녀처럼 생기 있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내 눈으로 목격했다. 또 자기 삶을 사랑하면서 내가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때 우리의 삶이 눈부시게 아름다워지고 그로 인해 세상을 밝게 비추는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미국 남부 지역 특성상 백인이 많아서 나 같은 외국인을 몇 번 만나보시지도 않았을 거라 보수적인 성격이시지 않을까 염려한 면이 무색하게도, 첫 만남에서도부터 푸른 눈을 반짝이며 밝고 큰 미소로 극동에서 온 고동색 눈의 나를 반겨주셨다. 캐서린 할머니의 동생이 운영하는 농장에 갔을 때 종이백에 내 이름을 써보라고 하셨을 때도 놀랐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까지 내 ‘이국적인’ 이름에 관심 가져준 외국인을 만나본 적 없었던 것 같다. 젊었을 땐 분명 희고 길고 아름다웠을 손가락에 힘을 주기조차 힘들어 보이는데도 핑크색 펜을 들고 앞좌석으로 내밀어주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잠시 모두가 차를 떠났을 동안 혼자서 종이백과 펜을 찾고 계셨을 걸 생각하니 감동해서 잠깐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리고 난 이후로는 내 이름을 발음하는 걸 연구하셨는지 내 이름을 신중하게 또박또박 잘 발음하셨다. 마치 하루 동안 한국인처럼 발음하는 법을 구글링해보셨었는지 말이다.
웨딩앨범 속 아름다운 당신의 모습을 보고 감탄해서 사진을 찍는 나에게 “오 찍지 마!” 하면서도 장난스럽게 왼쪽 눈으로 윙크를 날리던 사랑스러움에 웃음이 나왔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얼굴 가득 머금은 싱그러운 미소는 지금도 그대로였다. 그리고 내 예상과 같이 사진 속 눈부신 신부는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길고 아름다운 손을 가진 동화속 공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가끔 같은 질문을 반복하실 때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내가 쓸 글에 대해 물어보시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할머니께 내 글을 보여드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할머니의 취향에 맞게 프린트된 활자로 보여드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재밌을 것 같다고 평생 아끼던 책장을 관으로 만들어 달라 하실 만큼 책을 좋아하신다는 키티 할머니… 여전히 말괄량이 같은 모습 그대로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다가 내가 쓴 책을 만져보실 수 있으시면 좋겠다.
“보고 싶을 거야” 하신 그 목소리와 그 순간의 공기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평소에는 그저 통상적으로 하는 굿바이 정도의 인사 같았을 텐데 너무나 그 말이 내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 와닿았다. 나도 할머니가 보고 싶을 것 같은데 왠지 이게 마지막일까봐 그랬나보다. 어떻게 이틀 만에 이렇게 빨리 정이 들 수 있나 싶어서였을까. 키티 할머니랑 헤어지는 게 이상하게 너무 아쉬웠다. 60년의 나이 차이와 국적도 다르지만 캐서린 할머니만큼 친해지고 싶은 좋은 분(공교롭게도 그 분의 어머니)을 만났는데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싶었던 게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나 싶다.
그의 어머니 역시 92세에 숨을 거두셨다고 하는데 키티 할머니도 올해 92세가 되었다. 돌아가신 어머니 이야기를 하면서 마치 고향 내슈빌로 돌아가 죽음을 준비하시려는 듯한 모습에서 헤어짐의 징조를 발견하고 마음이 아팠다. 왜 굳이 나무랄 것 없이 좋은 시설에서 떠나고자 하시는지 알 것 같았다. 자녀들이 아무리 말려도 왜 그렇게 강경하신지 이해되었다. 자녀들도 모르는 건 아닐 것이다. 다만 그렇게 어머니를 보내고 싶지 않아서이지 않을까…
연어가 그러하듯 사람도 자신이 태어나 일평생 산 곳에서 생명을 마감하는 것이 인생 마지막에 바라는 소원인가 싶었다. 대공황 직전에 미대륙 개척 세대의 자녀로 태어나 일평생 한 사람을 사랑했고 그 사이에서 다섯 명의 자녀를 남기고, 그 자녀들의 자녀들을 보며 말년에는 거친 신대륙에 남긴 풍성한 가족의 역사를 돌아보는 작업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는 미국 남부의 한 여인의 삶이 주는 여운은 장장 3시간 동안 내 눈물을 멈추지 못하게 할 만큼 진했다.
비록 1927년생의 그 아름다운 영혼은 현재 테네시의 시골에 위치한 실버타운의 한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밝게 빛나는 두 눈에서 삶이란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아름다운 인생 하나로 인해서 그의 자녀 캐서린이 아름다운 영혼으로 성장해 극동의 한 나라에서 온 내게 이렇게 친절한 은혜를 베풀어주었다. 내가 미국이라는 땅에서 은혜를 입은 이유는 결국 키티 할머니의 자녀 교육과도 연관이 된 셈이다. 키티 할머니 덕분에 이렇게 우리 인생 하나하나가 얼마나 중요하고 심오한지에 대해 다시 느끼고 배웠다. 인생에서 절대 잊지 못할 기념비적인 만남 중 하나일 것이다. "See you s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