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전히 혼자 있게 되는 시간이 많았고 그의 연락을 늘 기다렸다. 그가 친구들이랑 놀 때면 늦어진다는 연락 한 통 먼저 받을 수 없었다. 2주에 한번 고작 평일 저녁에 보는 게 전부일 때도 있었다.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나에게 말했다. "소영이 너는 이성적인 매력은 정말 많은데, 대화는 잘 안 통하는 것 같아."
우리가 대화할 시간은 있었던가. 카톡도 전화도 만나는 시간도 너무 짧은데... 나는 그에게 "대화가 안 통하는 게 아니라 대화할 시간이 없는 거야. 시간이 없는 건 O튜브 때문이고.."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말실수한 것 같다며 "전엔 대화 많이 했었지.." 라며 얼버무렸다.
그날부터였다. 잡고 있던 모든 게 무너지는 것 같았던 때가.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있는 과정이라 생각하며 붙잡고 있었는데, 그의 말 한마디에 그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다. 내가 힘들어도 그가 괜찮다면, 그가 이런 생활이 좋다면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대화가 안 통하는 여자 친구가 되어있었다. 그날부터 하나씩 잡고 있던 마음이 벗겨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퇴근하고 집 가서 밥을 먹는 동안도 퇴근했다는 말 한마디, 연락 한 통 없는 그날 나는 더 이상 버틸 힘이 남아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소영이 너는 외적으론 정말 이쁜데 내면이 아름다운 것 같지는 않아."라는 그의 스치듯 했던 말들이 상처로 남아 가슴을 후벼 팠다.
자신이 모임 뒤풀이에 가있는 날 집에 간다 하고도 연락이 없어서 전화했는데 전화 오는 걸 알면서도 안 받던 그에게 화를 냈던 일로 "약간 망상증 그런 거... 있는 거 아냐?"라는 말을 들었던 것도,
"소영이 너는 내 눈에는 정말 너무 예쁜데, 다른 사람 눈에는 그렇게 예쁜 얼굴은 아닌 것 같아."라는 말 등등...
이 모든 말들이 내 마음속에서 바위처럼 단단해져 나를 계속 공격하고 있었다.
그의 말 대로라면 나는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인데, 만날 이유가 없는 사람인데 나를 왜 만나는지에 대한 의문도 들었다.
그에게 갑자기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다며 나의 상태를 털어놓았고, 우리는 통화를 꽤 길게 했다. 목소리를 듣고 싶어도 핸드폰을 들었다가 그냥 내려놓던 순간들이 참 많았었는데, 우리 사이에 문제가 있을 때만 가능한 통화시간이었다. 통화를 마친 후 그는 내일 퇴근하고 나를 찾아오겠다고 했다. 만나서 더 이야기하자고... 보고 싶어도 부담이 될까 싶어 만나자는 말을 참 아꼈었는데, 우리 사이가 삐걱거릴 때만 그가 나에게 내어주는 시간이었다.
다음날 그를 만나서 다 털어놨다. 그간 스치듯 하는 말들로 상처 받았던 것들. 그리고 이런 식의 나를 좀먹는 연애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는 것도.
그는 나에게 맞추겠다고 했다. 그리고 무척이나 미안해했다. 자신의 생각 없는 말들로 내가 받았을 상처에 대해 사과했다. 그는 매주 주말마다 나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1년이고 2년이고 노력해 볼 수는 있지만 계속 그럴 자신은 없다고 했다. 무엇보다 한번 더 내가 우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자신이 못 견딜 것 같다고 했다. 일단 우리는 일주일에 적어도 3시간씩은 카페에 가서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우리가 주말을 같이 보내기 시작하면서 그의 모습에서 다시 사랑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나가다 꽃집이 보이면 꽃을 사주기도 했고, 항상 예쁘다는 말을 해주며 특히 눈이 사슴눈 같다고 좋아했다. 머리를 묶고 있을 때면 올리비아 핫세 같다며 말도 안 되는 농담도 자주 해주었다. 그리고 이젠 정말 나 없으면 안 될 것 같다고. "소영이 넌 천사야"라는 말도 종종 하곤 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다시 길들여져가고 있었다. 같이 주말을 시작하는 것도 행복해했고, 더 이상 결혼 이야기가 나와도 부담스러워하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무엇보다 나와 같이 주말을 시작하는걸 행복이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것과, 나와 있으면 스트레스가 다 풀린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이 나의 마음에 안정감과 평안함 같은 것을 불어넣어주고 있었다.
그렇게 연애는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우리는 같이 휴가를 다녀왔고 휴가 내내 즐거웠는지 그가 다음 주에 일주일 동안 재택근무라며 내 오피스텔에 와 있겠다는 말을 했다. 우리는 그렇게 일주일 동안 같이 생활을 하게 됐다. 그리고 곧 그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틈틈이 그에게 줄 선물과 파티해줄 장식들, 케이크, 인화할 사진 등을 알아보았다. 누군가를 위해 이런 이벤트를 준비해보는 게 처음이라 어려웠지만 그가 기뻐할 모습을 상상하며 행복했다. 그리고 그의 생일날엔 미역국과 그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생일상도 준비했다. 자취방이 있을 때만 이런 것을 해줄 수 있기 때문에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을 다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의 생일이 되었다. 그가 올 시간에 맞춰 모든 것을 준비해놨고, 그가 내 오피스텔에 들어오는 순간 생일 축하 노래를 틀어 그에게 고깔모자를 씌워주며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그가 웃었다. 내가 어렵게 준비했을 모습이 상상이 가서 더 고맙다고 했다. 나의 마음을 너무 잘 알아서 자신은 치킨 시켜놓고 생일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만 해줬어도 좋았을 거라고 했다. 태어나서 고깔모자를 처음 써본다며 어색해하는 그와 같이 사진도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