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이 가고 있었다
네가 길들인 것에 넌 언제나 책임이 있어
우리는 지난주 그의 재택근무 1주일 동안 나의 오피스텔에 같이 있었다. 그와 나는 맞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었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연인끼리 며칠 동안 여행 가서 놀다 오는 것과 일주일을 같이 생활해본다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한 번도 남자 친구와 같이 생활해본 적이 없던 난 너무 행복할 것 같다는 기대와는 다르게 그에게 실망하게 되는 일도, 나에 대한 배려가 없단 생각에 기분이 상할 때도 있었다.
첫날 점심시간부터 삐걱거렸었다. 나는 출근하면서 점심시간에 집에 올 테니 점심을 같이 먹자는 말을 했었다. 그리고 12시 30분, 점심시간이 되어서 집에 와서 그와 점심을 먹고 난 후 그와 커피도 마시며 점심시간의 여유를 즐기다 가려했지만 그는 자신의 회사는 11시 30분부터 점심시간이라는 이유로 미리 점심시간을 갖기 시작해서 오후 1시부터는 업무를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5분만 놀자는 나의 말에 자신이 업무시간이라는 이유로 내게 단 1분도 내어주지 않았다. 재택근무니 점심시간이 유동적이라 내일부터는 나와 같이 점심시간을 시작하겠다고 했다. 서운했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며칠 후에는 점심시간에 점심으로 뭘 사갈지 묻고자 전화했지만 메시지도 전화도 그는 받지 않았다. 업무 중이고 핸드폰이 무음이라 몰랐다고 했다. 집에 들어가자 그는 업무 중이라 본체만체하며 내가 가까이 와서야 인사를 했다. 싱크대에는 그가 아침에 먹은 시리얼 그릇이 그대로 있었다.
유니폼을 입고 일하는 직업 특성상 나는 집에 오자마자 옷을 갈아입는데 그는 항상 집안이 훤히 보이게 블라인드를 올려놓고 있었어서 옷을 마음대로 갈아입을 수 없었고, 매일 환기를 시켜야 한다며 에어컨을 틀지 않고 창문을 열어놓고 있어서 여름날 땀을 흘리며 걸어온 나는 찜통 같은 더위를 느껴야 했다.
이 모든 게 나에게는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같이 있는 동안 나는 퇴근 후 집에 들어와서 같이 저녁을 먹고 운동을 다녀온 후 씻고 마사지를 하고 책을 읽거나 TV를 보며 시간을 보냈고, 그는 유튜브나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데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같은 공간에 있지만 같이 이 시간을 즐길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가 나와 영화를 보거나 같이 게임을 하려고 시간을 내면 나 때문에 그가 할 일을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냥 즐겁지도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날 토요일 오후에 퇴근하고 온 난 그를 집까지 데려다 주기 위해 오자마자 출발해야 했다. 일찍 일어나서 계속 TV를 봤다는 그는 컵 하나 씻어놓지 않았다. 피곤이 온몸에 밀려왔지만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부랴부랴 집안일을 하고 그를 집에 데려다주었다.
그를 데려다주고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신호대기에 멈춰서 있던 난 그만 잠들어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 버렸다. 몇 초 후 내 차가 무언가에 부딪히는 느낌이 들었고, 깜짝 놀라 눈을 뜬 난 앞차를 박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차에서 나와 앞차 운전자에게 연신 사과를 했다. 운전자는 화를 내며 나의 번호를 받아갔다. 그에게 사고 났음을 알렸다. 그는 자기 때문이라며 저녁에 가도 됐는데 뭐가 급해서 일찍 가느라 너 피곤한 것도 못 살폈다며 미안해했다. 나는 당신 탓이 아니라고 내가 부주의한 것이라고 왜 미안해하냐며 상대방 운전자에게 연락이 안 올 것 같다고 괜찮다고 했다.
그날 저녁 그는 친구들과 만나 술 한잔 하기로 했다고 하고 기다려도 밤에 집에 들어갔다는 연락을 주지 않았다. 나는 다음날 몇 시에 들어갔냐고, 아침에 이런 거 물어보기 싫다고 다음부터는 보내 놓으라고 했다. 그는 또 알겠다고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연인 사이에 이 정도 마찰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큰 싸움이 없는 우리가 나름 건강한 사이라고 느꼈었다. 하지만 그렇게 우리 사이에는 나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천천히 금이 가고 있었다.
그의 생일날 밤 양치 중인 나에게 그는 내일 새벽 6시에 집에 가야 한다고 했다. 아침에 엄마가 미역국에 밥 먹고 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의 오피스텔에서 그의 집은 1시간 정도가 걸리는 거리였고, 그의 집에서 그의 회사도 1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새벽 6시에 집으로 가 아침밥을 먹고 다시 회사로 간다는 게 이상했다. 주말에 가족과 식사도 했고, 집밥이라면 저녁에 먹어도 상관없는데 평소 아침밥도 먹지 않는 그가 아침밥을 먹기 위해 그 힘든 일정을 소화하겠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게 난 그에게 솔직한 말을 듣고 싶어 몇 차례 물어보았고, 그는 사실은 내일 재택근무라고 했다. 재택근무인데 나와 함께 있지 않으면 내가 서운해할까 봐 거짓말을 했다고 했다. 실은 좀 더 늦게 가도 된다고 나 출근하면 가겠다고 했다.
나는 그의 그런 점이 더 서운했다. 난 어차피 다음날 출근해야 해서 그와 같이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일주일의 재택근무시간 동안 우리 집에 있으면서 생기는 불필요한 마찰들이 싫었다. 그래서 그가 다시 재택근무 기간이 생긴다고 해도 오피스텔에 같이 있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새벽 6시에 가야 한다는 시간 계산을 하면서까지 나에게 거짓말하는 그에게 서운했다. "나는 이게 너무 서운한데..."라는 말을 뱉어낸 후 얼마간의 정적이 흘렀다. 그는 이런 상황을 괴로워하는 것 같았다. 재미있게 보고 있던 TV도 보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는 것 같은 그에게 난 "누워서 편하게 TV 봐.." 라며 이 정적을 깨고 자연스럽게 편안한 사이로 돌아가고자 했다. "응?.. 누워서 봐.."라고 말하는 나의 말에 그는 대답이 없었다.
몇 번 머리를 감싸고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반복하던 그는 자신의 가방으로 가서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그리고 뒤에 소파 있는 데로 가서 무언가를 정리하는 듯했다. 난 잘 보이지 않을까 봐 불을 켜줬다. 그리고 그는 세탁기로 갔다. 여름이라 내 오피스텔에 오면 그는 자신이 입고 온 옷을 세탁기에 넣어 돌리곤 했었다. 빨래를 하려는 건가 해서 "아 오빠 얼른 세탁기 돌려야겠다!"라고 말하는 나에게 그는 "나 갈게.."라는 대답을 하고는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가 그가 정말 가려고 하자 벌떡 일어났다.
"뭐 하는 거야..?"그의 팔을 붙잡으며 물었다. 그가 정리하던 소파에는 내가 그의 생일선물로 주었던 지갑이 다시 예쁘게 포장된 채로 올려져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그가 지금 단순히 나와의 마찰이 싫어 피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나와 이별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건 헤어지는 거잖아.." - "응.. 나 갈게.. 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것까지 거짓말을 하고 있잖아.. 재택근무하는 것까지.. 정말 말도 안 되는 건데.. 자꾸 너한테 미안해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고..." 그 말 뒤에 미안하다는 말을 끝으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눈으로 나를 쳐다본 채 그는 나를 떠나갔다.
그는 내가 지난 이별에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었는지,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내가 얼마나 아파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번보다 더 큰 충격을 내게 주었다. 나는 그렇게 아무것도 예감하지 못한 채로 다시 이별을 맞이하게 됐고, 텅 빈 방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을 열고 나가 엘리베이터 근처를 서성거려봤지만 그는 없었다.
첫날은 눈물도 나지 않았다. 다음날도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았다. 그 다음 날이 되었다. 점심에 밥을 먹으러 집으로 들어온 난 밥을 먹지 못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에게 생일 파티를 해주려 달아놨던 가랜드며 여러 장식품을 뜯어내면서 벽지가 같이 뜯겼다. 그 뜯긴 벽지를 볼 때마다 텅 빈 마음이 더욱더 나를 괴롭혔다.
너무 힘들다고 나에게 왜 이런 짓을 한 거냐고 울며 그에게 연락을 했다. 나와는 다르게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며 자신이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차분한 그의 답장이 왔다. 그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는 떠나갔고 나는 버림받았다. 이미 두 번째 같은 이별을 경험한 나에겐 깊은 상처만이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