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 난 가끔 대나무숲에라도 가서 마음속 구석에 쌓인 외침을 토해내고 싶을 때가 있다. 이놈의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려면 견뎌야 하는 것들이 지긋지긋하게 싫다고 말이다. 눈치와 체면과 모양새와 뒷담화와 공격적 열등감과 멸사봉공과 윗분 모시기와 위계질서와 관행과 관료주의와 패거리 정서와 조폭식 의리와 장유유서와 일사불란함과 지역주의와 상명하복과 강요된 겸손 제스처와 모난 돌 정 맞기와 다구리와 폭탄주와 용비어천가와 촌스러움과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기타 등등."
- 문유석, <개인주의자 선언> 중
태어나 첫 회사, 첫 출근은 얄궂게도 송년회 회식 자리였다. 제대로 인사도 하기 전에 내 손에 쥐여진 건 마이크. 노래를 고르라고 한다. 정말 하기 싫지만 해야만 하는 게 사회생활이다. 노래하는 게 싫은 게 아니라, 강요받는 게 싫은거다. 20대 초년생이던 그때는 스스로를 탓했다. 거리낌 없이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그러면 사람들이 더 좋아할텐데 뭐이리 쑥쓰러움이 많은지. 친구들하고 있으면 잘만 놀면서 왜 사람들 앞에선 못하는걸까, 나를 한심하게 여겼다.
'개인주의자 선언'을 그때 읽었더라면. 내 탓을 조금은 덜 했을 것 같다. 문유석 판사의 말대로, "누군가는 광장 속에서 살기 힘든 체질이기도 하다. 그걸 죽어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냥 레고에는 여러 모양의 조각들이 있는 거다."
문유석 판사는 소년 시절부터 좋아하는 책과 음악만 잔뜩 쌓아놓고 홀로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개인주의자였다고 한다. 요령껏 사회생활을 잘해나가는 편이지만 잔을 돌려가며 왁자지껄 먹고 마시는 회식자리를 힘들어하고, 눈치와 겉치레를 중요시하는 한국의 집단주의적 문화가 한국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믿는다. 대공감이다. 그토록 많은 비생산적인 사회생활들을 하는 시간에 나는 그냥 조용히 숨만 쉬고 싶다. 상명하복과 강요된 겸손 제스처와 모난 돌 정 맞기와 다구리와 폭탄주와 용비어천가와 촌스러움과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기타 등등을 하는 시간에 잠을 자는 편이 생산적이지 않을까.
개인주의는 사회와 사회성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여러 종류의 개인이 모인 사회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개인주의'는 '이기주의'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피한다고 해서 사회의 문제를 외면하거나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판사는 '진짜 용감한 자는 자기 한계 안에서 현상이라도 일부 바꾸기 위해 자그마한 시도라도 해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개인이 갖고있는 성향과 한계를 '문제'로 여기지 않고 인정하는 자세. 레고 조각이 꼭 맞물리지 않더라도 각자의 생김새대로 자그마한 시도들을 할 수 있을 때 개인도 사회도 생산적으로 변하지 않을까.
"직업적으로 그다지 도움이 될 것은 없고 오해받을 소지는 많은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은 내 나름대로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이다. (...) 대단한 철학이 있어서가 아니라 체질이 소시민적이다. 야심도 없고 남들에게 별 관심이 없고, 주변에서 큰 기대를 받는 건 부담스럽고, 싫은 일은 하고 싶지 않고 호감 가지 않는 사람들과 엮이고 싶지 않다. 내 일을 간섭 없이 내 방식으로 창의적으로 해내는 것에 기쁨을 느끼고, 내가 매력을 느끼는 소수의 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내는 걸 좋아하고, 심지어 가끔은 가족으로부터도 자유로운 나만의 시간을 갖길 원한다."
"평생 하루하루를 분노, 절망, 투쟁, 당위만으로 채우는 것을 신성하게 생각하는 이들은 불행하다. 그리고 그들이 이끌고 가는 곳에 행복한 유토피아가 있을 리 없다. 나는 소박하게 그리고 다양하게 일상 속의 작은 행복을 채워가는, 그러면서도 마음이 가는 일에는 주저 없이 자기 힘닿는 범위에서 참여하는 이들이 이끄는 곳으로 가고 싶다."
- 문유석, <개인주의자 선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