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 싶었던 이야기 중의 일부
아래는 6월 한 달 동안 온라인 글쓰기 모임 <와사비 라이팅 클럽>에 참여해 작성한 1주차 글입니다. 모두가 공통으로 받은 주제는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아>였어요.
여러 작업노트를 써야 하는 기간을 앞두고.. 무엇을 쓰고 무엇을 쓰지 말아야 하는지 분간하기 어려운데 뱉어낼 말들은 길고 길어서.. 일단 아무거나 써보자는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시작했습니다.
아, 그리고 와라클은 더 커뮤니티를 통해 뵈었던 하마님이 운영하는 커뮤니티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아주 안전한 공간을 원했고, 왠지 여기라면 서로의 안전을 지켜 줄 사람들이 다수일 것 같아 믿고(..) 썼더랬습니다. 그리고 덕분에 앞으로 쓸 여러 에세이의 토대가 될 글들을 마감할 수 있었습니다.
종종 가장 꺼내고 싶은 이야기지만 가장 꺼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 사실 가까운 한 명 정도만 알면 되는 그런 이야기, 나의 많은 것을 이루고 있지만 동시에 이제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이야기. 나이가 조금 들고나니 굳이 꺼내면 흠이 되겠구나 싶은 이야기. 그럼에도 왜인지 가장 이해받고 싶은 이야기, '이야기 하기'를 통해 공감과 연대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그런 이야기.
어젯밤 자기 전에 누워서 글쓰기 주제를 곱씹었다.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아냐는 말. 아주 잠깐 생각했는데도 잠이 퍼뜩 깬다. 왜인지 오해받는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아니, 사실은 자주 한다기 보다는 오해 받았다고 느낄 때마다 과하게 불편한 것 같다.
오해라는 것이 표면적으로 소통에 드러날 때는 바로잡으려는 노력이라도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상대방이 정말로 ‘오해’했는지 부터 알아야 하니까 말이 길어지고 영 곤란하다.
생각하기에, 나는 누군가와 옳고 그름을 논할 만한 성격도 못 되고, 그다지 능동적으로 나를 해명하는 사람도 아니다보니 그저 약간의 눈치로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겠구나’ 정도만 짐작할 뿐.
만약 우리가 안전한 관계라면,
오히려 ‘너는 왜 그래?’라는 물음이 다정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대개 나는 불편한 상황들이 오면 아무렇지도 않은척 과한 너스레를 떨다가 망하거나, 누구도 증명을 요구한 이가 없는데 혼자 나서서 증명하다가 우스운 그림이 되거나 또는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는 누군가의 넘겨 짚음을 넘겨 짚으며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거나. 보통은 그랬다.
친밀한 사이의 소통에도 완전한 이해란 없을 텐데, 그렇담 오해는 어울려 사는 삶에 당연히 수반되는 것임에도 나는 아직도 적절한 대응을 모르겠다.
나는 종종 마켓에 나간다. 내가 만든 것들을 들고 테이블에 앉아있다 보면 종종 알은 체를 해주시는 분들이 있다. 한 번은 내가 쓴 글을 인상 깊게 읽었다고 찾아온 분이 계셨다. 당연히 고맙고 반가운 마음에 크게 웃으며 인사를 드렸는데, 몇 마디 나누시더니 정말로 내가 글을 쓴 사람이 맞는지 물으셨다.
그분이 글을 통해 읽어내고 상상한 나는 좀 더 다른 모습이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성숙해보이는 어른 여성의 모습..? (실제의 내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 분은 이런 질문들이 실례인 것 같아 죄송하다고 하시면서도 내 나이가 몇 살인지, 정말로 이 글을 쓰신건지 등을 물어오셨다. 그 마음을 알 것 같아 나는 그냥 웃었다.
그래도 오히려 솔직하게 말씀해주시는 게 좋다고, 괜찮아요. 제가 좀 제 글이랑 안 어울리죠. 뭐, 저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개의치 않겠다고 말씀도 드리긴 했는데, 결국 나는 2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아서 여기에 이렇게 쓰고 있다. (이제 잊을 수 있다! 제 구김살이었어요 죄송해요 사랑해요..)
분명 더 어렸을 때는 내가 더 노력했던 시절이 있었다. 천진난만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누구와도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내가 되고 싶은 마음에, 나의 유쾌한 모습을 내가 확인해야만 했던 시절이 있었다.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나를 확인하는 순간이 좋았다. 종종 외동딸 같다거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것 같다거나, 또는 ‘너 O형이지!’하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았다. 사람들이 나를 오해하길 바랐다.
물론, 그 젊은 시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닌 것을.
나는 아주 가난과 덜 가난, 그 어딘가를 오가며 나의 청소년기를 보냈다. 유일하게 경제권을 갖고 있던 아버지는 여러 번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졌고, 그때마다 우리를 떠났다. 걷지 못하는 동생과 그 동생을 보살피느라 남루했던 엄마의 모습은, 이혼 재판에서 아버지의 이혼 사유 중 하나로 쓰였다. 아버지도 가정을 꾸리면서 이루고 싶었던 모습이 있었을텐데, 사회의 법체계도 크게 아버지를 나무라지 않았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엄마의 하소연 속에 아버지의 외도를 알았다. 콜라텍이나 쌕쌕이 비디오, 걸레같은 년들이라는 단어들 속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인생에서 여러 번 우리를 떠났는데 사랑하던 여자에게 버림받거나 돈이 떨어지면 다시 우리를 찾아왔다.
(조금 재밌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아버지는 매번 모든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아버지가 술을 먹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 하지만 동시에 안타까운 점은 아버지가 맨 정신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라는 것.
엄마와 아빠는 자주 싸웠다. 할머니는 종종 엉망이 된 집을 치우러 와서는, "부부 싸움은 칼로 물베기야"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던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설명을 요구했지만 (당연히) 설명을 듣고 나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랑 아빠는 따로 사는 게 백 번 옳았다.
엄마가 악을 쓰고 지르는 소리에도, 숨어있던 방의 미닫이 문을 열고 나갈 수 없었던 긴긴밤은 아직도 악몽처럼 남아있다. 아버지는 엄마의 머리채를 잡아쥐고 큰 방과 거실의 문턱을 넘어다녔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갖게 된 내 첫 플라스틱 책상은 얼마안가 재활용 쓰레기로 버려졌다. 엄마는 부서진 밥상 다리를 동여매서 썼다. 아버지가 집 안의 유리를 모두 부수고 나간 적에는 며칠이고 신발을 신고 다녔다. 당장 치울 수 없어 미안하다는 엄마에게, 집에서도 신발을 신으니 재밌다고 웃었다. 하루는 내가 뺨을 맞고 나동그라졌다. 20키로도 채 되지 않는, 걷지도 못하는 동생은 아버지에게 들려 던져졌다. 내 동생은 서랍 손잡이에 등허리가 부딪혀 오랫동안 아팠다.
내가 3학년이 되던 해, 엄마는 이혼하기로 했다. 이혼 후 우리는 월세가 10만원 정도 하는 단칸방으로 이사를 갔고, 교회나 동사무소에서 나눠주는 쌀을 받아 먹었다. 우리더러 불쌍하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도 이 삶이 훨씬 나았다. 엄마는 항상 나에게 내가 괜찮은지, 행복한지를 수도 없이 물었고, 나는 언제나 진심으로 지금이 훨씬 행복하다고 대답했다.
이후로도 다 쓰지 못할 수없이 긴 이야기들이 있다. 내가 막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쯤, 아버지는 아파트에서 살고 싶지 않냐며 다시 우리를 찾아왔다.
자기가 살던 여자와 헤어지고 싶을 때가 되면, 아버지는 그렇게 한 달에도 몇 번씩 우리가 사는 곳을 들락거리기 시작한다. 우리가 평소 사먹지도 못하는 치킨 같은 것들을 사들고 와서 환심을 사고, 나와 동생을 인질삼아 엄마를 모텔로 불러낸다거나 좋은 곳으로 드라이브를 시켜준다거나 그랬다.
엄마는 매번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고, 우리는 지하방에서 20평짜리 저층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당연히 나는 아버지와 불같이 싸우는 청소년기를 보냈다. 물론, 나 역시 매번 도리는 없었다.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아버지와의 불화 덕에 기숙사 학교로 보내졌고, 아버지의 폭력에서 비교적 안전한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그의 지원 덕에 수능도 준비할 수 있었고, 급하게 1년이나마 미술입시학원도 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마음을 잡았나 싶던 내 이십대 중반,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는 또다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갔다.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엄마를 힘들게 한다.
어린 시절에는 불행이 불행인줄도 모르고 살았는데, 크고 난 후 찾아온 불행은 더 구체적인 모습이 되어 우리를 괴롭혔다. 가끔씩 찾아와 난동을 부리는 아버지는 덤. 우리가 가진 것은 다시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아무것도 없는 삶에 익숙해져야 했다.
그 후에는, 흠이 될까 이야기 할 수 없는 나와 이제는 지난 이야기를 털어놓고 위로받고 싶은 내가 좀처럼 화해하지 못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내 상황도, 생각도 어딘가에 꼼짝없이 붙들려 더 나아갈 수 없는 것 같았다. 주변 또래들이 이직하거나 승진하거나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계속 아르바이트를 했다. 왜 취업이 싫으냐는 물음에 직원들이 다같이 먹는 점심식사가 싫다고 했다. 종종 누군가들은 나에게 배가 불렀다고 웃었다. 나도 웃었다.
연민이라는 감정에 반쯤 가라앉아서 세상을 보는 일은, 별로 유쾌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박차고 일어나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다. 세상이든, 사람이든 알지도 못하는 게 나를 서운하게 한다고 혼자 엉엉 울면 그만이었다. 그때는 행복해지겠다고 열심히 노력하는 일이 더 비참했다.
하지만 사실 항상 모든 문제의 해법은 그렇듯이, 켜켜이 쌓인 서운한 감정들을 들추다 보면 결국 세상도 누구도 아니고 그냥 못난 내가 거기 있다. 이제는 나이가 이십대 후반인데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는 내 모습을, 나 스스로를 보는 일을 견딜 수 없었던 것 같다.
나는 당장 낼 핸드폰 비도 없는데, 그런것쯤은 기본으로 하고 사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물론, 그 때도 나는 취업보다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버텼으니 자업자득이다.) 카페 알바나 외주 알바를 해서 종종 엄마의 빚에 보태고, 내 생활은 그저그랬다.
당시에 만나던 여자친구는 내가 입고 먹는 것의 많은 것을 보태주었고, 친구들은 내가 그린 그림을 항상 응원했다. 하지만 그렇게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준다고 해도 내 마음은 밑빠진 독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억울한 것도, 서운한것도, 핑계도 많았다. 그때를 떠올리면 당시의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많이 끼친 것 같아 가장 미안하다.
그리고 내 20대가 끝나던 해, 그 전부를 함께 보낸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커다랗게 비어버린 그 자리에 묘한 해방감을 느끼며 누웠다. 이후 몇 년 동안은 프리랜서로 자리를 잡아갔다. 끼니를 해결하는 시간 외에는 대부분 일을 했다. 24시간 중 한 번은 누울 수 있으니까, 하는 생각으로 밤을 새는 날이 많았다. 몇 년 지나고 다달이 월세와 먹고살기가 해결되다보니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못난 생각도 덜했다.
한동안은 균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아주 많이 했다. 내내 쌓아두고 살았던 것들을 이제는 비워내야지 하고. 연민도, 강박도 더 비워내고, 내 삶을 사는 것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좀 더 가볍게 비워내고 싶었다. 좋을 것도 나쁠것도 없이, 그 누구의 탓도 하지 않고 그냥 내 모습을 바라보는 연습과 함께, 새로 배운 세상을 차곡차곡 채워넣어야지 하고.
그리던 어느날 아버지는 또다시 백년해로를 접고, 다시 우리를 찾아왔다. 올해로 돌아온 지 5년이 넘었으니 어쩐지 이번엔 꽤 오랜시간 머무르면서 진심으로 아버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우스갯소리로 우리가 젊은 시절 내내 바람핀 놈들은 구천을 떠돌다가 다리밑에서 죽는다는 욕을 자주 했는데, 이제 자신의 노년이 걱정되어 돌아온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뭐, 우리는 올해 처음으로 별 탈 없이 해를 넘기고 있다.
아버지는 작년부터 종종 스스로 깨달은 바를 이야기한다. 나도 좀 친근해졌다. 사실 핸드폰에 아버지 번호가 저장이 안 되어 있었는데, 어느 날에 걸려서 이제는 '아빠'라고 저장도 했다. 어느 순간에는 이 정도의 아버지라면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싶기도 하고, 아니 근데 사람이 변하던가? (3년 전쯤에는 부엌에서 칼을 들었다. 과연 사람이 변할까?)
물론 답은 평생을 지켜봐야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돌아온 아버지 덕에 훨씬 큰 경제적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올해 나는 부모님 집 근처로 이사를 왔다. 덕분에 나는 매일 새로운 가족을 경험하고 있다. 아버지는 처음으로 가족들의 생일케이크를 사 오고, 전화로 일상을 얘기하고, 엄마와 동생의 끼니를 챙기고, 나에게 농담을 하고, 카톡으로 귀여운 고양이의 영상을 보낸다. 이제야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간다. 처음으로 그의 어린시절을 들었을 때는 외로웠겠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 천지를 떠돌면서도, 그 어느곳에서도 자기 자리를 찾지 못했을테다.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니 그 모든 것의 영문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신은 오랫동안 이해받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아버지의 외로운 삶을 안쓰럽게 여기기 이전에, 지나버린 엄마의 젊음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아빠라는 사람에게 있다는 것도 말하고 싶다. 아빠는 이제야 말하기를, 엄마의 인생에서는 자신이 없는 편이 좋았을 거라 말한다. 내 생각도 그렇다. 엄마가 아빠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텐데. 엄마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사랑을, 나는 줄 수 있을까. 엄마가 아빠를 만나 얻은 삶의 전부는 나와 동생뿐인데, 나는 엄마의 삶에 충분한 기쁨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서로의 지나간 시간들을 되짚어 보면서 이제서야 어떻게 우리도 엉거주춤 가족이라고 우겨보고 있다. 사실 어떤 문장을 써야 지금의 감정들을 표현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엄마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아들과 딸의 남은 삶을 위해 엄마의 삶을 아빠에게 넘겨준 셈이니까.
그래서 조금은 바라건대, 그냥 우리가 아주 길고 긴 화해를 시작했다고 믿고 싶다. 더불어 남은 시간동안의 그 화해가 아주 진심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해라는 사소한 감정으로 시작한 이 글을 통해, 내 생각도 조금 더 가벼워진 것 같다. 앞으로도 나는 여전히 누군가의 오해에 쉽게 속상해지겠지만, 그냥 마음을 고쳐먹는 편이 낫겠다.
나는 이제 당신이 나에 대해 모르고 있어도 괜찮다. 내가 당신에게 알려 준 적이 없으니까, 당신이 나를 충분히 오해해도 괜찮은 일이다. 어쩌면 당신이 나를 오해하는 만큼, 사실은 나도 당신을 오해하고 있을테니까.
생각해보면 썩 비슷한 일이다.
대신, 우리가 약간의 어긋남으로 서로를 섣부르게 판단하는 사이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분명 어느 사이에는 판단이 있겠지만, 그 판단조차도 개의치 않고 웃을 수 있게 노력할테니.
당신이 그렇게 여길만해요. 내 부족함을 짚어줘서 고맙고, 사실 나도 당신을 그렇게 생각했었거든요? 그럼에도 우리 오늘 같이 얘기할 수 있어서 기쁘네요. 하고 말하고 싶다. 분명 오랜시간을 함께 견뎌온 이들만이 할 수 있는 소통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오래도록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의 면면을 보여줄 수 있는 사이가 된다면 좋겠다.
지난 내 책에도 쓴 문장이지만, 각자의 궤도를 도는 수많은 별들이 모이면 그 공간은 커다란 우주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수많은 궤도의 별들이 모여 거대한 우주가 되는 그 순간을, 함께 경험할 수 있는 사이로 남고싶다.
정말 오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