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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llustrator 서희 Aug 23. 2024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순간, 그리고 사랑의 모양






아래의 글은 6월에 참여했던 <와사비라이팅클럽> 4주 차의 글을 수정한 것입니다.



4주 차 공통 주제는 글 속에 타인의 순간을 재현하는 것이었어요. 당시 재현의 윤리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오가던 시기였고요. (아직..일 수도) 글의 창작과 재현은 불가분의 관계 같아서 흥미롭기도 하고, 아마 글을 쓰시는 분들이라면 그 어려움에 모두 공감하실 것 같아요. 아마 재현에 대한 각자의 기준이 있으시겠죠?



저는 항상 가족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어요. 기록하고 싶다는 마음인지, 어디에 뱉어놓고 싶은 마음이었는지는 모르겠어요. 반반일 수도 있고.



하지만 이전에는 글을 완성한 적이 별로 없어요. 딱 한 번, 아버지에 관한 시를 써서 상을 받아버린 적이 있는데, 어찌나 부끄럽던지요. 담임 선생님은 멋대로 제 시를 복도에 전시하셨고, 진짜 아버지 일이니? 하고 물어보셨어요. 당시 선생님의 붙잡은 손을 뿌리치고 인사도 하지 않고 자리를 벗어났던 게 기억나요. 나중에 따로 찾아가서 시를 치워달라고 했어요.




그 복잡했던 마음이 지금은 꽤 괜찮은 것 같아요.




아래에 쓰는 글은 어머니를 기록하고 싶어 쓴 글이고요. 글을 쓰고 나면 제 머릿속의 어떤 장면들이 흐릿해질지, 아니면 더 선명해질지 궁금했는데 전자 쪽인 것 같아 조금 마음이 놓여요.










전화를 받고, 주말에 들른 집.



가구도 별로 없는 넓은 집의 거실 귀퉁이에 엄마는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서 멍하니 구부려 앉은 엄마의 등을 보고 있었는지, 어쨌는지, 엄마의 퉁퉁 부은 입이 기억난다.



아빠가 또 나갔어. 그 여자한테 갔어.

우리가 붙잡았는데, 웃으면서 나갔어.

잘 살라고 하면서.



울음인지, 화인지, 알지 못할 것들이 나를 꾹 짓눌러 자리에서 일어날 수도 없이.



아빠가 앉았던 딱딱한 나무소파에 앉아, 엄마를 안아줘야 하는지, 어째야 하는지. 우리가 처음 살아 본 이 넓은 공간이 숨 막혔다.



엄마는 엉망진창의 모습으로 매일 같이 울었다.



울면서 아빠가 그날 저녁 거실에서 현관까지 어떻게 걸어 나갔는지, 아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던 동생을 어떻게 걷어차고 나갔는지, 가게에 종종 찾아오던 그 여자와 또 어떻게 바람이 났는지 이야기했다.



바보같이,

내 인생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



아빠가 나가고 일주일인지 한 달인지, 본래도 10년째 신경증과 우울증 약, 수면제와 진통제를 달고 살던 엄마는 평소보다 더 크게 앓았다. 자기를 해치는 환청을 듣기 시작하고, 감기에도 풀썩 쓰러지더니, 엄마의 이는 스스로 빠졌다.



평소 이로 앓은 고통이 많기도 했지만, 사람의 이가 하나씩 저렇게 전부 혼자 빠져버릴 수도 있구나- 나는 아직도 그 캄캄한 고통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엄마는 웬일로 자기가 먼저 치과에 가겠다고 했다. 아빠와 재판을 하겠다고도 했다. 이미 법적인 이혼은 내 9살 적에 끝났지만, 이후로도 들락거린 아빠와의 사실혼을 인정받고 법적인 위자료를 청구해야 했다.



엄마는 어느 날 전화가 와서, 너희 보험이랑 적금 해약해도 돼? 하고 물었다. 동생과 나의 세뱃돈 통장까지 털어서 2천만 원도 안 되는 돈, 공공근로와 전단지 알바 같은 것들로 엄마가 한 푼 두 푼 모아 만들어준 그 통장. 나는 한 번도 그 돈이 내 돈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당연히 괜찮지.



동생은 매달 받았던 장애 연금까지 보태서 엄마를 병원에 보냈다. 임플란트라고 하는 비싼 것을 해보자고, 몇 달만 참으면 엄마가 평생 고생했던 입냄새랑 염증 그런 거 다 괜찮대.



엄마는 (엄마답게) 가장 싼 병원을 찾아 몇 달에 걸쳐 이 전체를 임플란트로 심어버렸다. 모양새가 그렇게 좋지만도 않고, 의사 선생님도 불친절하고, 심지어 그 병원은 몇 년 지나지 않아 폐업까지 했지만 엄마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천만 원이 넘는 돈을 써봤다며 웃었다.



그리고 이어 엄마는 아빠에게 위자료 소송을 걸었고 그 증인으로는 내가 출석했다. 모든 사실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는데도 재판은 쉽지 않았다. 위자료를 받기 위한 자격으로 가정에 대한 엄마의 모든 기여를 증명해야만 했고, 아빠의 외도는 직접 증거가 아니면 소용이 없다고 했다.



수개월에 걸친 재판이 끝나고 우리는 가까스로 위자료를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위자료는 법적인 의무보다는 권고에 가까웠고, 때문에 판사는 아빠 쪽을 따로 남겨두고 약속을 꼭 지켜달라는 말을 덧붙였다고 한다. 그 덕분에 나는 학자금 대출을 받지 않고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렇게 한 학기를 마무리 짓고 집으로 돌아오니 엄마의 몸무게는 34킬로까지 줄어 있었다.



재판 후 접근금지 기간이 끝나고 나자, 아빠는 다시금 위자료를 주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엄마를 괴롭혔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주는 위자료의 대가를 치르라는 일일지도 몰랐다.



아빠는 항상 갑자기 찾아왔다. 버러지 같은 것들과 그만 엮이고 싶다고, 아빠는 재판까지 걸어서 자기의 돈을 받아먹는 우리를 아주 괘씸하게 여겼다.



그날도 아빠는 갑자기,

엄마가 일하는 가게의 유리문을 열어젖혔다.



미친년, 씨발년 등의 욕설을 내뱉으면서, 아빠는 엄마 앞에 놓여있던 모니터를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이어 모니터가 깨지고, 전화기, 유리컵, 서류, 프린터기, 의자, 테이블이 죄다 바닥으로 떨어지고 넘어졌다. 이렇게 숨을 몰아쉬는 아빠는 대개 사람같지 않을 때가 많다. 소리 지르며 막아서는 엄마의 머리위로는, 책상에 있던 컵라면을 쏟아부었다.



나가라고 악지르는 동생의 목소리, 아빠의 욕설, 엄마의 비명, 깨진 컴퓨터, 넘어진 테이블, 다리가 부러진 의자, 깨진 유리들과 흩어진 집기들, 아빠가 퍼부은 뜨거운 컵라면을 뒤집어쓰고 울면서도 지지 않는 엄마.



그리고 옆 김밥집이었는지, 핸드폰집이었는지, 뜯어말리지는 못해도 누군가 신고를 했다고 했다. 얼마 안 가 사이렌이 울렸고, 출동한 경찰은 가족간에 잘 해결 보시라는 말로 상황을 정리했다.



아빠가 돌아가고, 경찰도 돌아가고

모여든 사람들은 삼삼오오 흩어졌다.



한참 수군거리던 사람들까지 모두 흩어지고 가게에 엄마와 동생만 남았을 때, 엄마는 그때 처음 자기가 뒤집어쓰고 있던 큼큼한 냄새와 꼬부랑한 면발을 알았다고 했다.



손에 잡히는 대로 가게의 집기들을 부수던 아빠에게, 누구 도와주는 이도 없이 혼자 그 작은 몸집으로 악을 쓰고 나가라고 외쳤을 엄마의 그 순간이, 나는 상상으로도 견딜 수 없다.



여전히, 견딜 수 없다.



나는 그날 그 자리에 없었다. 지방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던 나는 대개 엄마의 곁을 지킬 수 없었고, 엄마는 일이 다 끝나고 나면 나에게 이야기했다.



괜찮을 리가 없는데도

엄마는 항상 괜찮다고 했다.



나는 너무 미안해서, 엄마의 모든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었다. 항상 불행이라는 같은 구간을 반복하는 엄마의 테이프를, 나는 지칠때까지 들었다.



세상엔 멀쩡히 잘 사는 사람도, 가족도 많은데. 하필 내 엄마의 인생 위에서 만난 갖가지 불행들은 저들끼리 지치지도 않고 왜 이리 사람을 괴롭히는지.



하지만 이렇게도 듣고 저렇게도 듣다가

이내 나도 지치는 날이 오면

한 번씩 나쁜 소리가 툭 튀어나오곤 했다.



아빠가 싫다는 거 그거 사실 다 거짓말 아니냐고. 이번에도 아빠를 진심으로 믿은 거지? 그러니까 이렇게 힘들어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의 진심이 순간일 뿐인걸 알면서도. 아니, 차라리 그랬던 거면 더 노력할 수는 없었냐고.



세상의 뻔하고 뻔한 나쁜 소리들을 했다.



어른스러운 모습은 다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미숙하고 모난 모습이 툭툭 튀어 나왔다. 스스로 감당해야 했던 것에 비해 아직은 턱없이 모자랐다.



답도 없는 이야기를 반복하면서 우리가 겪은 모든 순간은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똑같이, 때로는 다른 모양으로 지독하게도 끝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가장 잊고 싶은 각자의 순간들을 벗어나지 못했다.



엄마는 종종 내가 하는 말들을 꾹 삼켰다. 옳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 그 말들을, 꾹꾹 씹어 삼켜 넘기는 것 같았다. 나에게 소리 한 번 지르지 않고, 엄마는 내 말이 다 맞다는 표정으로 그 아픈 이야기들을 씹어 삼켰다.



오랜 시간 서로에게 토해냈던 그 어떤 것도,

사실은 비워진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미숙하고 부족했던 나는 이십 대 중반, 엄마와 함께 살던 집을 떠났다. 매일 죽고 싶다고 말하는 아픈 엄마를 두고, 엉망진창인 집을 떠나겠다고 했다. 나 하나 살자고 온갖 핑계를 대고 친구와 자취를 시작했다.



엄마는 아직도 그때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그 아파트에 같이 이사 갔었던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매일같이 찾아오는 아침에 눈을 뜨는 일이 지옥이었다고만 한다.



어렸을 때부터 가난한 집에 친구 한 번 데려오지 못한 딸에게 이제는 부끄럽지 말자고, 내야하는 빚의 이자를 감당하면서도 위자료 전부를 써 기어코 이사 온 아파트였는데, 내가 떠나버렸으니.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철없던 것이 무슨 변명이 될 수 있을까.



엄마는 내가 떠나고 텅 비어버린 안방에서 매일같이 지는 해를 바라봤다고 했다. 그 넓은 거실에 앉아있던 그 모습 그대로, 동그마니 앉아서 오래도록 지는 해를 바라봤다고 했다.



이제야 엄마의 나이를 살고 있는 나는 가끔씩 엄마의 삶으로 돌아간다. 내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기억 위로, 홀로 외로웠을 엄마의 시간을 겹쳐 본다. 지금의 나보다 더 어린 나이에 갑자기 세상에 혼자 남아, 장애를 가진 아들과 초등학교 3학년의 꼬맹이를 책임져야 했던 엄마의 젊음을 상상해 본다.



죽고 싶었다고 말하는 엄마의 길고 긴 날들은

어떤 생각들로 채워져 있었을까.



4평의 단칸방에서도,

곰팡이 가득한 지하방에서도,

나는 엄마와 정말 행복했는데,

엄마는 어땠을까.





바보 같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





엄마는 가끔씩 내가 자신처럼 살지 않을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그래서 좋다는 말을 한다. 그러면 나는 하나도 기쁘지 않고 마음이 조금 슬퍼진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내 삶으로 엄마의 시간을 다시 살아볼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래도록 그랬던 것 같다. 엄마의 모든 순간과 기억들을 듣고 또 듣고 헤아리고 위로하고 삼켜서, 그럼에도 꽤 괜찮은 삶을 사는 것이 마치 엄마에게 해 줄 수 있는 내 작은 보답처럼 여겨져서.



어쩌면 많은 딸과 어머니가 그렇듯이, 부족하나마 엄마의 삶으로 얻은 내 삶이 당신에게 보답이 될 수 있기를 바란 시간이 길었다.



그리고 오늘은 덧붙여 쓰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20대에 우연히 참여했던 집단상담 수업의 이야기인데, 엄마를 사랑하는 방식에 대해, 또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에 어쩌면 이것이 정답이겠구나 했던 이야기를 덧붙여 쓰고 싶다.



당시 수업에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누구냐는 물음에 엄마를 대답한 적이 있다. 말도 제대로 끝마치지 못하고 혼자 울음이 터져서는, 어떻게 하나 싶었는데 당시 선생님이 꼭 맞는 대답을 해주셨었다.



요즘은 그 대답이 자주 생각난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누구도 그 사람의 무대를 대신 서 줄 수는 없는 일이라고. 사랑하는 일로 그 사람의 자리를 빼앗을 수는 없으니, 그러니 서희씨가 어머니의 무대에 대신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을 대신 살아주는 게 아니라 그들의 춤사위에 같이 발 맞추는 일이라는 것. 왜인지 선생님의 그 말씀을 듣고 나는 더 많이 울었던 것 같다.



그 사람이 아무리 이해하지 못할 모습으로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고 있어도, 그래서 모든 사람들의 비난과 야유가 쏟아져도, 그 엉망진창의 무대에서 내가 그 사람과 눈을 맞추고 함께 웃고 박수칠 수 있다면, 우리가 손발을 맞춰 춤출 수 있다면, 그 분의 무대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그저 함께했던 내가 어머니의 무대를 기억해주면 된다고 하셨다.



어머니가 최선을 다해 보여준 그 삶의 무대를,

내가 기억해주면 충분하다고.


그 말을 통해 처음 나는

올바른 사랑의 모양을 본 것만 같다.


오래도록 그마음 그대로

엄마의 무대를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함께 하는 것으로

가장 행복한 삶이, 무대가 될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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