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기 Jul 09. 2024

L이사의 불행

RIP

L이사는 박사학위 소유자다.

대학 졸업 후 바로 대학원으로 진학해 석사와 박사 학위를 연이어 취득했다.

L이사는 박사 과정 중 결혼했는데, 아내는 석사 과정을 마친 후 취업한 상태였다. 결혼 후 두 자녀를 두었고, 박사 과정을 마치자 큰 고민 없이 취업을 선택했다.

L이사가 취업한 회사는 큰 규모는 아니지만 업계에서는 유명한, 업력이 오래 쌓인 회사였다. L이사가 회사의 유일한 그리고 첫 번째 ‘박사’였기 때문에 회장은 L이사라고 부르지 않고, L박사라고 부르는 걸 좋아했다.

 

L이사는 연구를 즐겨하는 박사로 노는 걸 즐겨하지 않을 거처럼 생각되지만, 그를 한번 본 사람들은 그가 사람들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얼마나 많은 술을 마셔야 취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회사의 많은 직원들과 대부분 잘 어울렸고, 특히 사람들의 마음을 사는 방법을 알고 있는 듯, 그를 만난 사람들은 그에 대해 '멋진 남자, 재밌는 분' 이런 식으로 얘기했다.

 

L이사는 퇴근이 매우 늦었는데, 직원들과 회식을 하는 날에도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한참을 앉아 있다가 퇴근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주말에도 한 달에 두세 번 정도는 꼭 출근해 업무를 챙겼다.

L이사가 맡은 업무가 많았던 탓도 있지만, 본인 일에 대한 욕심, 회장의 기대에 대한 부응, 가족 특히 아내에 대한 보답 등의 이유로 더 많은 일을 하려고 했던 거 같다는 게 그를 아는 사람들의 의견이고, 내 생각도 비슷하다.

 

나는 L이사 그리고 그의 연구소 직원들과 함께 1박 2일 워크숍을 간 적이 있는데, 그의 주량을 보고 놀랐다. 체격이 좋아 술을 잘 마실 거라 생각은 했지만,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면서 흐트러지지 않고, 유쾌하게 분위기를 이끌면서 의미 있는 얘기를 놓치지 않는 그를 보며 어린 시절 나로서는 한편으론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L이사의 몸에 이상신호가 발견된 건 회사에서 진행한 건강검진이었다. 정밀진단 결과 간암으로 확진되어 치료를 받기 시작했고, 회사는 L이사에게 일정기간 병가 처리를 통해 급여를 제공했다. 타고난 강골 덕분인지 L이사는 3개월 정도가 지나자 출근을 시작했다. 그러나 1년이 채 되지 않아 L이사는 암으로 사망했다. 치료를 받으면서 차도가 있는 듯했으나 암은 L이사의 몸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가 허약해진 틈을 타 L이사의 생명을 위협했고, 결국 L이사는 암을 이길 수 없었다.


나는 L이사와 함께 근무할 때 그의 발병과 투병 과정을 알았고, 그가 몇 개월의 치료 후에 회사에 복귀하는 것까지 보았다. 그 후 얼마 지나지않아 나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그를 봤을 때 그는 건강이 많이 좋아진 듯했고, 술만 안 먹을 뿐 모든 일상을 암 발병 이전처럼 하고 있었다. 나는 L이사와 개인적인 친분이 깊었던 건 아니었기 때문에 퇴사 후 그와 따로 연락을 취할 일은 없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대략 6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어느 날 자다가 L이사가 꿈에 나타났는데 잠깐 웃고 떠들던 그가 그만 가야 한다고 해 서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지난밤 꿈이 너무 이상해 출근 후 L이사와 함께 일하고 있던 후배에게 연락을 했다.

-어쩐 일이에요? 잘 지내요?

-그냥저냥 지내지. 잘 지내지? 다른 게 아니라, L이사님 잘 지내?

-어머, L이사님 어제 아침에 돌아가셨어요. 내일이 발인이야. 알고 전화한 거야? 안 그래도 연락할까 말까 했는데.

-이사님이 어제 꿈에 나왔어. 나랑 얘기하다가 가셨는데, 이상해서. 나랑 연락을 하던 분도 아닌데.

-어머어머. 이사님 갑자기 안 좋아지셔서 병원입원하신 지 3주 정도밖에 안 됐는데, 어제 아침에 돌아가셨어요. 이사님이 인사하러 다니셨나 보다.

 

L이사의 장례식장엔 함께 일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와 있었다. 사람들은 L이사와 함께 했던 술자리와 워크숍, 축구를 했던 이야기, 함께 만들었던 연구보고서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L이사는 뛰어난 업무 능력과 좋은 성격, 준수한 외모 등 사람들이 호감을 가질만한 것들을 두루 갖추었다. 그러나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아이들을 두고 요절했다. 건장한 체격까지 갖춘 그가 갑작스레 암으로 절명하리라곤 아무도, 심지어 본인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공부했고, 회사를 다니면서도 연구소장을 맡으며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사람들과 어울리길 좋아해 술과 담배를 즐겨했다. 그러니, 남보다 튼튼한 체력을 바탕으로 남보다 더 많이 뛰어왔던 그의 일상이 그의 생을 소진시켰분명할 것이다. 인터넷에서 그에 관한 뉴스와 기록을 찾아보았지만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다. 그의 흔적은 그의 죽음 이후 세상에서 조금씩 그러나 완전히 사라질 것 같다.


L이사의 죽음 이후 그가 다니던 회사의 연구조직은 다시 그의 입사 이전으로 돌아갔다. 변화와 새로움을 기치로 달리던 부서 조직이 수장을 잃자 방향을 찾지 못하고 단순하고 일상적인 업무 중심으로 돌아간 것이다. L이사의 죽음은 개인으로서도, 회사로서도 큰 불행이 되었다.


이전 11화 2세 경영인들 (2)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