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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화 Sep 01. 2019

연애를 망치고 나서야 깨달은 것들

정말 애착 성향이라는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또 한 번 연애에서 도망쳤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 손으로 연애를 망쳤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이별을 통보할 때는 그렇게 자신만만할 수가 없었다. 이 사람이랑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이유를 백 개도 더 들 수 있을 것 같았고, 이런저런 근거를 박박 긁어모아 하여간 나랑은 안 맞는 사람이라고 땅땅 결론을 내렸다. 같이 지낸 시간이 얼마나 좋았든 간에 그런 건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뒤통수를 맞은 것은 연애가 끝나고도 한참이 지난 다음이다. 문득 이 연애가 어떻게 끝났는지를 돌이켜보는데, 아뿔싸. 내가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상대로부터 도망쳐야만 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연애를 깨버릴 때는 내가 이 사람을 왜 좋아했는지가 하나도 기억이 안 났었는데, 막상 이제와 내가 왜 이 사람을 밀어냈는지가 기억이 안 난다니. 심지어는 이게 내 연애에서 몇 번 반복되었던 패턴이라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설레서 잠 못 이루게 하던 연애를 내 손으로 깨부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대체 왜 이런 바보짓을 하고 있는 걸까.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는 건 또 오랜만이라 한참을 파고들었다. 좋아하던 마음이 컸던 만큼 더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익숙한 심리학 이론에서 하나의 설명을 찾았다. 심리학 개론 시간에 열심히 배웠으나 그게 나에게도 적용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애착 이론'이었다. 애착 이론에서는 사람이 어떤 식으로 인간관계를 맺고 유지하는지에 따라, 애착 유형을 크게 아래 세 가지로 분류한다.



안정형 애착: 친밀감과 의존을 편안히 받아들이고 효과적인 의사소통을 하는 달인들

불안형 애착: 친밀감을 갈망하고 연인 관계에 지나치게 몰두하며 자신이 파트너를 사랑하는 만큼 파트너 역시 자신을 사랑해줄 수 있을지에 대해 걱정한다.

회피형 애착: 파트너와의 친밀감이 높아지면 자신의 독립성이 줄어든다고 여겨 파트너와의 친밀감을 끊임없이 줄이려고 애쓴다.

- 『그냥 흘러넘쳐도 좋아요』, 백영옥 



그러니까 설명에 따르면 나는 회피형 애착 유형에 가까웠다. 생각보다 애착 이론을 근거로 들어 연애의 성공과 실패를 논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여기저기에 설명도 많고 충고도 많았다. 물론 인간을 세 가지 유형으로 완벽히 분류할 수는 없겠으나, 불안형과 회피형을 양 극단으로 하는 애착 유형의 스펙트럼이 있다면 확실히 나는 회피형에 가까운 것 같았다. 회피형 애착 유형을 가진 사람들은 1) 일정 수준 이상으로 타인과 친밀해지는 것에 거부감을 느껴서 2) 누군가와의 관계(특히 연인관계)가 너무 빠르거나 깊어지면 불안해하고 3) 나는 독립적인 사람이야! 를 외치면서 친밀한 관계에서 도망친다고 한다. 4) 물론 실제로 독립적이고 성취지향적인 사람이 많다고는 하는데, 5) 그래서인지 힘든 일이 생겨도 남에게 털어놓거나 의지하려고 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해결하는 경향이 있다고. 혈액형 분류처럼 누가 들어도 내 얘기 같은 게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아무리 이리저리 돌려봐도 내 얘기가 맞았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애착 유형에 문제가 있다는 걸 부인하고 싶었지만, 회피형 애착을 가진 사람들이 '불활성화 전략'을 펼친다는 설명에는 머리가 띵-하고 울리는 기분이었다. 내가 이해가 안 갔던 바로 그 부분, 도대체 갑자기 왜 이 사람이 싫어졌던 것이며 헤어지고 나선 왜 그 이유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지에 대한 이유를 그 전략이 설명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회피형 애착 유형을 가진 사람들은, 상대와 너무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면 '무의식적으로' 불활성화 전략이라는 방어기제를 작동시킨다고 한다. 어느새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던 친밀감을 깨닫고 놀래서 뒷걸음질 치는 꼴이라고 해야 할까. 사람마다 방법은 다르지만, 하여간 말하자면 오만 가지 방법을 다 동원하여 상대와 심리적인 거리를 만들어내려 안간힘을 쓰는 거다. 아직 진지한 관계를 가질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일부러 거리를 두기도 하고, 상대의 단점을 일부러 찾아내서 계속 단점에 대해서만 생각하기도 하고. 중요한 것은 이게 정말 '무의식적'으로 진행되는 심리적 기제라는 데 있었다. 헤어지겠다고 결심하며 내가 이것저것 끌어모아 붙였던 그 사람의 단점들, 나랑 잘 될 수 없는 이유들, 그건 전부 내 머릿속에 있는 문제였다. 무의식적 기제가 발동하여 안간힘을 쓰고 그 사람을 밀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에는 정말, 내가 갑자기 이 사람을 싫어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애착 유형이라는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말하면 아직까지도 이 애착 이론이 정말 제대로 된 공식인지, 그래서 회피형 애착 유형이라는 게 실존하기는 하는 건지 영 확신이 서진 않는다. 애착 이론은 주로 유아기 때 부모와의 관계에서 그 근원을 찾는데, 나의 경우는 아무리 들쑤시고 뒤져봐도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이유를 찾기가 힘들기도 하고. 심리학 이론이라는 게 늘 그렇듯이 이것도 누군가 만들어낸 하나의 프레임일 뿐이니 꼭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는 문제다.


그러나 확실한 건,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게 애착 이론이니 불활성화 전략이니 이런 용어들로 설명되든 말든 간에. 스스로 느끼기에도 나는 매우 독립적인 성격이었고, 그래서 누군가를 내 삶으로 끌어들일 때마다 영 울타리가 높았다. 언제나 내 삶과 내 일이 우선순위의 꼭대기에 있었고 좋아하는 사람과 연애를 시작했다고 해서 남들처럼 그게 후다닥 재 정렬되는 일이 없었다. 정말 절망적인 부분은 내가 사실 그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이번에는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 상대가 들어오기 전에 미리 내 높다란 벽을 부숴두려고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했었다는 사실이다. 나랑 잘 맞는 사람이라고 느꼈고 같이 있는 시간이 즐거웠기에 나름 최선을 다했다. 상대가 좋았으니까,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 이걸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랄까, 내 무의식에 져버린 기분이다. 그렇게나 노력했는데, 막상 내 일이 바빠지고 몸이 아픈 순간이 오자 그런 노력조차도 통째로 뭉개졌다. 의식적으로 노력하던 것이 무의식의 강력한 방어기제에 휩쓸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쨌든 나는 상황이 힘들 때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 연인은 무릇 내가 힘들어하면 어깨를 빌려주고 싶어 하는 존재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나는 상대가 '괜찮아, 여기 기대도 돼' 하자마자 그대로 도망쳤다. 실은 나는 그 순간 덜컥 무서웠던 것이다. 지금껏 혼자서 잘 견뎌왔는데 정말 저 사람한테 기대도 될지 알 수가 없었다. 동시에 내가 그 어깨에 기대고 싶어질 정도로 이 사람과 가까워졌다는 사실이 나를 걷어찼던 모양이다. 너무 빨라, 너무 깊어, 도망쳐- 하면서. 그래서 나는 도망쳤다. 내가 무엇 때문에 도망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냥 다 네 잘못이라고 쏘아붙이면서.

 


"회피형은 보통 상대방과의 거리나 독립성을 원하는 자신의 욕구를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도망가고 싶지만 정작 도망가고 싶은 이유는 모르는 것이다. 일단 회피형은 그런 느낌을 받으면 이제 자신은 파트너에게 관심이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 사람은 운명의 반쪽이 아닌데 계속 괴로워하면서 만나야 할 필요가 있는가? 하지만 그 후로도 회피형은 계속 연애에 실패하면서 똑같은 과정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 『그들이 그렇게 연애하는 까닭』, 아미르 레빈&레이첼 헬러




뒤늦은 깨달음은 무섭다.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이 전부 내 잘못임을 깨달았을 때는 더더욱. 이제 와서 나는 놓쳐버린 시간들이 아쉽고, 그 사람이 그립고, 스스로가 원망스럽다. 그러나 어쩔 수 있나, 이미 내 손으로 뭉개버린 것을. 몰랐을 때면 모를까 전부 다 내 잘못인 걸 깨달은 마당에 '미안해, 나 좀 이해해줘'하고 손을 뻗을 만한 뻔뻔함이 내겐 없다. 그저 이게 나 자신을 몰랐던 것에 대한 벌이려니- 하고 조용히 이 자리에 주저앉아 견디는 수밖에. 그리고 지금의 이 감정을 꾹꾹 쌓아두었다가, 언제고 내가 또 누군가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지면 다시 한번 상기시켜야겠다. 저 사람의 잘못은 하나도 없고 문제는 전부 내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뭐가 문제든, 본질을 탈탈 털어 어떻게든 바꿔보려고 최선을 다해볼 생각이다. 나야 이게 나 자신이니까 아무리 멍청이 같아도 어떻게든 이해해보겠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 거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주저앉아서 상대에게도 매번 나를 이해해달라고 떼를 쓸 수는 없으니까. 좋아하는 사람에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상처를 주는 바보짓을 그만두려면 나를 열심히 쪼개서 바꿔보는 수밖에. 


물론 이게 혼자 앉아서 바꿀 수 있는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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