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의 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화 Oct 26. 2019

숏컷 예약을 하니 긴 머리가 예뻐 보이고

곧 사라질 것들은 모두 아름답지만


숏컷을 하기 위해 미용실을 예약했다. 이번 주 일요일. 이제 딱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큰맘 먹고 이 예약을 한 건 무려 한 달 전의 일이므로 그 기다림은 꽤 오래되었다.


숏컷을 하기로 결정한 데에 딱히 대단한 이유는 없다. 나는 유난히 머리카락이 빨리 자라는 편이고,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긴 머리를 잘 견디지 못한다. 머리 말리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게 제일 성가시다. 드라이기 흔드는 것도 귀찮은 와중에 고데기까지 들고 설칠 깜냥은 없으니 보통은 제멋대로 길어버린 머리를 대충 빗는 게 전부다. 그러고 나가도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 신경 쓰여 보통은 곧 하나로 질끈 묶고 만다. 긴 머리에 펌을 해보기도 했지만 성가신 건 마찬가지라 여전히 스타일은 무조건 포니테일. 그렇다고 딱히 단발이 썩 어울리지도 않는 것 같아 반쯤은 포기하고 살던 차에 숏컷 스타일이 눈에 띄었다. 요즘 유난히 많이들 하기도 하고, 왠지 저 정도면 머리 말리는 시간이 혁신적으로 줄어들 것 같아서.



ⓒCloudyPixel on Unsplash



숏컷 전문이라는 미용실에 예약을 하고 한 달을 기다리면서 나는 자주 투덜댔다. 그 사이에 머리는 계속 길었고 끝은 지저분해졌다. 좀 더 일찍 예약 날짜를 잡을걸 그랬지. 이것저것 따져가며 고른 날짜가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아 영 답답했다. 매번 머리를 묶을 때마다, 아 진짜 빨리 다 잘라버리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 건 이번 주에 들어선 다음이다. 숏컷 예약이 드디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자, 갑자기...긴 머리가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저 지금 머리 괜찮지 않아요?



월요일 아침, 일하다 말고 뜬금없이 이렇게 묻기도 했다. 딱히 공들여 드라이를 한 것도 아닌데 어쩐지 웨이브도 자연스럽고 가르마도 그렇고 적절하게 볼륨도 들어간 것 같고. 평소 같았으면 오전을 넘기기 전에 질끈 묶었을 머리를 그대로 만지작만지작, 퇴근할 때까지도 묶지 못했다. 회사에서 머리를 풀고 다니는 일이 거의 없는 터라 몇몇은 '오늘 왜 머리 안 묶었어요?'하고 묻기도 했다. '왠지 오늘 머리가 맘에 들어서요' 대답하면 그러게, 오늘 웨이브 괜찮다고 대답해주기도 하고. 이것이 일주일 내내 이어졌다. 머리가 마음에 들었다. 긴 머리가 평소처럼 걸리적거리지 않았고, 이대로라면 계속 길러도 괜찮겠다 싶기도 했다. 그렇게 자르고 싶던 머리가 갑자기 예뻐 보인다니. 세상에, 사람의 마음이란 어찌 이리도 간사한가.






곧 사라질 것들은 모두 아름답지만    



문득, 지난 회사에서 마지막 일주일을 보내던 때가 떠오른다. 징글징글해서 얼른 떠나고 싶다며 퇴사일만 간절히 기다려왔었는데, 퇴사가 딱 일주일이 남자 내 시선이 조금 달라졌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치던 모든 것들이 애틋하고 아름답게 보였달까. 한 번 내다보지도 않던 창문 앞에 앉아서 '여기 이렇게 뷰가 좋았나' 새삼스레 감탄하기도 하고 별다를 것 없는 사무실을 눈에 담으려 여러 번 둘러보기도 했다. 이전과 비교해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내가 곧 이곳을 떠난다는 사실이, 그러고 나면 이 모든 것들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내게 색안경을 씌웠다. 아름다운 무지갯빛의 안경을.


생각해보면 모든 것들이 그렇다. 내가 매일 무심코 지나치는 풍경을 여행자들은 공들여 사진으로 남긴다. 곧 떠나게 될 곳이고 어쩌면 일생 다시는 볼 일이 없을 풍경인 탓이다. 나 역시 외국에 나가면 뭐 하나라도 더 눈에 담으려고 꼭꼭 씹어 넘긴다. 일상의 출근길에서는 내내 스마트폰에만 시선을 두고 있으면서.


곧 사라질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이 곧 사라진다는 것을 떠올리기만 하면 모든 것이 아름다워진다. 일주일 뒤면 내 머리가 싹둑 잘리게 될 것을, 혹은 이 사무실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을 떠올리듯이. 아무리 지리하게 느껴지는 일상이어도 이 모든 것엔 언제든 끝이 온다. 일주일의 여행보다는 그 끝이 멀리 있기 때문에 쉬이 체감할 수 없을 뿐.







자, 그래서 나는 이 아쉬움을 뒤로하고 예약한 미용실에 숏컷을 하러 간다. 그 머리가 또 금세 자라 어깨 아래서 찰랑거릴 쯤이 되면 또 숏컷이 훨씬 더 예뻐 보이겠지. 정말이지 어쩜 이렇게 마음이 간사하게 굴까 싶지만, 토닥토닥 잘 달래가며 일단은 계획한 대로 해볼 생각이다.


긴 머리에 끝이 있듯이 내 인생에도 끝이 있으니, 머리 스타일이 어떻든 그간의 모든 것은 아름다울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연애를 망치고 나서야 깨달은 것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