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번째 한 글자 주제, 복
난 진짜 일복이 차고 넘치나 봐, 사주를 한 번 보든지 해야겠어
옆자리의 선배가 쓰러지듯 책상에 엎드리며 한탄을 했다. 유난히 팀에 일이 많은 요즘이라 다들 비슷비슷한 심정이기는 했다. 일복이 많은 사람이 정말 따로 정해져 있기라도 한 걸까. 물론 언제나 세상에서 내 일이 제일 많고 힘들게 느껴지는 게 사람 마음이겠으나, 유난히 일거리가 눈앞으로 많이 떨어지는 사람이 있기는 한 것 같다. 왜 주변에서 봐도 꼭 그런 사람이 있지 않은가. 일 없던 팀으로 옮겨가면 갑자기 그 팀의 (특히 그 사람의) 일이 폭발하고, 심지어는 회사를 옮겨가도 갑자기 타이밍 맞춰 허공에서 일거리가 퐁퐁 솟아나는 것 같은 사람들. 어째서 이렇게 확신에 차서 말하느냐면,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냥 다들 이렇게 사는 거라 믿었지 내가 특별히 일복이 많다거나 유난히 내 앞에만 일이 쌓인다거나 하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내가 일복이 많은가?' 생각하게 된 건 주위에서 한 마디씩 툭툭 비슷한 말을 던졌기 때문이다. 너도 참 일복이 많다, 거기 가서도 그러고 있다니 넌 일복을 몰고 다니나 보다, 너는 왜 이렇게 맨날 일복이 터지냐 등등, 계속 듣다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뭐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고 이직도 딱 한 번 해봤을 뿐이니 어딜 가나 일이 따라다닌다고 하기엔 아직 데이터가 부족하지만, 언제 어디서든 한아름씩 손에 일을 안고 있는 편이기는 했다. 남들은 일이 없어서 좀 쉬어간다는 시즌에도 나 혼자 괜히 자질구레한 일들을 떠안고 뛰어다니는 일도 잦았고. 심지어는 재미로 본 사주팔자에서도 일복이 많다고 나왔으니 뭐 어느새 자타공인 일복이 많은 사람이 되어버린 기분.
사주팔자에도 쓰여있다니 일복이라는 건 정말 타고나는 걸까 싶기도 하지만, 어쩐지 사주에 쓰여있는 건 '이 사람은 일복이 많다'라기보단 '이 사람은 성격이 이렇고 저래서 일을 많이 하겠다'는 느낌에 가까울 것 같다. 자세히 보면 일복이 많다고 투덜거리는 사람들은(나를 포함하여) 대개 성취지향적이라 일 욕심이 많거나, 성격적으로 없는 일도 만들어하는 스타일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흘러들어온 일을 잘 못 쳐내는 경우가 많았다. 말하자면 스스로 일복을 생성하고 있는 사람들이랄까. 타고난 기질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니 본인에게는 그 인과관계가 뚜렷하게 느껴지지는 않고, 그저 '나는 일복이 왜 이렇게 많아!'하고 소리들을 지르고 있을 뿐.
뭐 일복 자체가 타고나는 거든 내 성격이 글러먹어서 일을 주섬주섬 모으고 있는 것이든, 결론은 내가 일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이니 큰 차이는 없다. 그래도 일이 많아 죽겠다고 표현하기보다 '일복이 많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꽤나 해학적이라 그 표현 자체가 나름 마음을 달래주기도 한다. 최근에는 누군가 '일복이 많은 사람은 그냥 일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일 못하는 사람한테는 누가 일을 그렇게 주지도 않는다고' 하기에 그걸로 심심찮게 위로를 삼기도 했다. 일에 치여 죽을 정도가 아니라면 남들보다 조금 더 일이 많고 조금 더 바쁜 것이 뭐 크게 문제가 되겠나. 그래도 일단은 '복'이라는데, 살다 보면 이 복이 켜켜이 쌓여 내게 도움이 될 때도 있겠지.
그리고 회사생활 4년 간 내가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면, 일복이야 어쨌든 간에 역시 회사에서 중요한 건 일보다 사람이라는 거다.
회사에서 중요한 건 일보단 사람이라고, 학생 때도 그런 얘기를 몇 번 주워듣긴 했었다. 그럴 때마다 대체 그게 뭔 소린가 싶었다. 회사는 일을 하려고 모인 곳이지 사람들이랑 친구 하자고 모인 곳이 아닌데? 내게 딱 맞는 일을 찾아 멋지게 해낼 수 있다면 같이 일하는 사람이 어떻든 다 뭔 소용인가 싶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몇 년간 온몸으로 부딪혀가며 배운 것은 결국 그 한 문장이야말로 회사생활 전체를 관통하는 진실의 문장이라는 것. 중요한 문장이다. 회사에서 중요한 건, 일보단 사람이다.
부연하자면, 일이라는 것은 결국 다 거기서 거기다. 일은 많을 때도 있지만 적을 때도 있고 내게 쉬운 일일 때도 있고 어려운 일이 섞여있을 때도 있다. 일복이 많다고 징징대는 사람이든 아닌 사람이든 대부분의 경우를 관통하는 공통점이 있다면- 일은 하기 싫다는 것이다.
그렇다. 4년 차 회사원으로서 감히 말하건대, 웬만한 일은 전부 다 하기 싫다. 이 부분에서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일을 통해 자기 계발을 하고 성취감을 느끼는 경우도 많다는 걸 나도 알고 있다. 나 역시 그런 이상적인 삶을 늘 꿈꿔왔으며, 지금도 일의 어떤 부분에서는 성취감과 자기효용감을 느끼며 살고 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일은 하기 싫은 것에 가깝다. 특히 회사의 일이라는 게 대부분 그렇다. 내가 하면서 성취감을 느끼고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일이 10이라면 하기 싫어도 해내야 하는 일이 90. 월화수목금 일하고 토일 노는 평범한 직장인들이라면 아마 그 비율이 비슷비슷할 거라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 그 자체가 힘들어 도망치는 사람은 몇 명 보지 못했다. 일이라는 게 어딜 가든 다 비슷하다는 통찰을 이미 다 깨우친 탓일까. 말하자면 일이 하기 싫고 일이 힘든 건 모두에게 기본 설정에 가깝다. 그건 어느 회사 어느 팀을 가도 비슷할 것이다. 기실 회사에서 사람을 제일 힘들게 하는 건 일이 아니라 사람이다. 견디지 못하고 떠나는 사람들은 대개 사람이 힘들어 견디지 못한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너무 잘 맞고 즐겁다면 일이 아무리 빡세도 어찌어찌 견뎌볼 수 있다. 그러나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다 끔찍하다면, 일이 아무리 설렁설렁 편해도 오래 견디기는 힘든 법이다. 아무리 일이 힘들어도 사람이 괜찮다면 견딜 수 있다. 바꿔 말하면, 결국 그 모든 것을 견뎌내게 하는 것은 사람이다. 일복을 상쇄할 수 있는 건 인복 뿐이다.
요즘 우리 회사에, 특히 우리 팀에 일이 많고, 그중에도 꽤 많은 부분이 내 앞으로 떨어진다. 일복이라는 게 어디서 굴러 떨어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일 수도 있음을 알면서도, 나는 도대체 왜 이렇게 일복이 많은 거냐고 아마 내일도 소리를 지르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월요일이 다가오는 게 그렇게 끔찍하지만은 않은 건, 그렇게 소리를 지를 때 옆에서 등을 두드려주는 사람들이 있는 덕이다.
그렇다. 이 바쁜 와중에도 여전히 좋은 사람들이 켜켜이 내 주위를 두르고 있다. 자신의 일복이 얼만큼이든 자신에게 주어진 만큼의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 그 와중에도 세심하게 서로를 챙겨주는 사람들, 분위기가 가라앉을 참이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음기를 불어넣는 사람들이. 인복이 있다고 해야 할까. 다들 나만큼 일복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라 서로의 일까지 덜어내 주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그들이 없다면 이 무거운 일복을 혼자 지고 영차영차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실없는 농담에 같이 웃고 진심 어린 조언과 격려에 미소 지을 수 있다면 오늘의 일 열 가지 정도는 가벼운 마음으로 쳐낼 수 있는 법.
이렇게 바쁘게, 그러나 덕분에 여전히 안락하고 따뜻하게, 새로운 곳에서의 한 해를 보내고 있다.
앞으로도 내게 주어진 일복이야 얼마든 감내할 테니, 그 길에 인복도 같이 딸려왔으면.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할 만큼의 일복과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인복이 함께 했으면.
아무래도 역시 회사에서는, 일보다 사람이 중요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