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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녜 Oct 21. 2019

46개월째 독서모임 중입니다

열세 번째 한 글자 주제, 책

16년 1월부터였다. 트레바리라는, 프랑스 말이거나 이탈리아 말일 것만 같지만 순우리말이라는 이름의 독서모임을 하기 시작한 건.


처음 시작하게 된 이유는 복잡하지만 간단했다. 나는 내가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대학생 때 읽은 책이라곤 전공 책 말고는 딱히 기억이 안 나서. 책을 많이 읽은 시절은 초등학교 때 이후론 없는 것 같아서. 그래서 내가 알던 내가 아니라는 것에 새삼 놀라서, 내가 알던 나로 돌아가려고 다시 책을 읽는 습관을 들이려고 등등. 얘기하자면 이유는 매우 다양하고 구구절절 하지만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자극한 건 ‘샘’이었다.


15년 말쯤, 친구가 독서모임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모임 사람들과 때로는 밤늦게 모여 술도 마시고, 주말에 모여 브런치도 먹으러 간댔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책을 꾸준히 읽고, 종종 페이스북에 독후감도 보였다. 멋져 보이는 습관이었다. 나도 갖고 싶은 습관이었다. 샘이 났다. 그래서 그렇게 그다음 시즌, 나도 독서모임이라는 걸 한번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책에 대한 부채감이 항상 있었다. 이제 책 좀 읽어야지, 하는 부채감. 책은 많이 읽으면 당연히 좋은 존재라는 믿음 때문이었을까. (옛날 얘기면서도) 나 원래 책 많이 읽는 사람인데, 라는 자부심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정작 혼자 읽으려고 할 때는 무엇을 읽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서점 구경을 가는 건 즐거웠지만, 선뜻 손이 가는 책은 없었다. 특히 텍스트 위주의 책은 집중해서 진득하게 흐름을 이어가야 하니 내 선택으로 책을 고른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 당시 사는 책의 대부분은 사진집이었다. 사진집은 내게 구매의 기쁨과 눈의 즐거움, 감성의 여운을 남겨주었지만 두고두고 생각하게 하지는 못했다. 책을 샀다는 즐거움을 위한, 그리고 진득이 보겠다는 부담을 덜기 위한 선택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냥 나는 이미지 독해력이 떨어지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렇게 책에 대한 부채감에 부담감이 더해졌다. 혼자 습관들이기는 참 어렵다지만, 책 습관 들이기도 이렇게 어려울 줄은 몰랐다.




그렇게 시작한 독서모임은 내게 책 고르는 부담감을 없애줬다. 매달 정해진 책을 함께 읽으니 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됐다. 아주 간혹 한 달 내에 다 읽는다는 게 힘들 것만 같은 책이 선정되면 좀 괴롭긴 했지만 그래도 읽어야 하니 읽었다. 책 고르는 부담이 없다는 건, 그리고 주기적으로 책이 “골라진” 다는 건 꾸준히 책 읽기를 시작하는 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심지어 모임에 온 사람들은 책에 아주 열성이었다. 매달 만날 때마다 읽고 싶은 책, 혹은 읽은 책을 많이도 추천해댔다. 저런 책은 어떻게 알게 된 건지, 저런 분야에는 어쩌다 관심을 갖게 되었을지, 추천하는 책의 내용을 어떻게 저렇게 달달 외운 것처럼 조목조목 알려주는지.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 많은 모임이었다. 그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 추천받은 책을 더해 읽기 시작했다.  읽는 책이 늘어나다 보니 리듬감이 생겨났다. 리듬감이 생기고 나니 책을 읽을수록 책이 내게 새로운 책을 소개해줬다. 한 달에 한 권, 혹은 두세 권까지도 부담스럽지 않게 읽으려면 어떻게 시간을 쓸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꾸준함에 대한 걱정이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게다가 트레바리에서는 독후감을 써오라고 했다. 독후감 없이는 모임에 참석할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 수행평가 용 이후로 처음인 독후감이었다. 400자만 채우면 되는 거긴 했지만, 같이 모임을 하는 사람들만큼 열성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다. 독후감에 자꾸 이 말 저 말 붙었다. 내 말을 붙이다 보니 내 버전의 책이 내 기억 속에서 만들어지는 느낌이었다. 읽어놓고도 읽었는지, 무슨 내용이었는지 잘 기억 못 하던, 단순히 기억력 탓으로만 돌리던 나는 이게 다 기록의 문제였다는 걸 깨달았다. 진작에 메모라도, 한 줄이라도 적는 버릇을 들일걸, 뒤늦게서야 후회했다. 



책 읽는 습관을 잡고, 읽은 책을 내 책으로 만드는 연습을 하니, 이제는 내가 읽고 싶은 책을 골라볼 여력이 생겼다. 주제 없이 책을 읽는 모임에 있던 나는 방랑을 시작했다. 맛있는 걸 좋아하니 미식을 주제로 하는 곳, 연애를 하고 있으니 연애와 결혼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곳을 비롯해서 젠더 이슈와 동물권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모임까지 커버리지를 넓혀갔다. 관심 주제에 대한 책을 읽고, 내 버전의 글을 쓰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본다는 건 생각보다 강력한 행위였다. 내게 민감하게 다가오는 주제일 때 특히 그랬다. 나에게 중요한 문제면서도 생각해보지 않은, 혹은 생각하지 않으려 외면했던 것들을 마주 보게 하는 행위였다. 가끔은 힘들면서도 그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건 꽤나 큰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말고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었고 나누기 힘든 이야기들이었다. 그 자체로 아주 큰 위안과 용기가 되었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독서모임 4년 차면 무엇을 하게 될까. 책을 읽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러면서도 다양한 분야에 호기심을 열 수 있는 사람. 그걸 기반으로 뭐라도 해보자고 힘을 내는 사람. 지금의 나는 이 정도까지는 커온 것 같다. 5년 차에는 또 어떤 재밌는 책과 사람이 다가올까. 어떤 이야기와 생각들이 나를 변화하게 할까. 내년 모임도 참,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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