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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화 Nov 24. 2019

술도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  

 열다섯 번째 한 글자 주제, 술 



술을 처음 배운 건 대학 신입생 때다. 많이 유해졌다고는 하지만 그때까지도 여전히 '사발식'이라는 문화가 그대로 남아, 개강 직전 환영회에서부터 막걸리를 한 사발 들이켜야 했다. 그 뒤로도 매일같이 이런저런 이유로 술자리가 있었다. 막걸리도 비싸다 하여 대부분은 주야장천 소주만 들이켜는 모임이었다. 겨우 1년 일찍 입학했을 뿐인 선배들이 그때는 하늘처럼 보이던 때라 술을 주면 주는 대로 받아마셨다. 다 그렇게 했으니 그게 당연한 줄 알았고, 뭐랄까 '주류 사회'에 편입하려면 그래도 술을 좀 마실 줄 알아야 했다. 마시고 토하고 또 마시고, 취해서 업혀가 놓고 다음날 또 술을 받아마시며, 술을 배웠다. 선배들이 말하던 대로 확실히 먹을수록 술이 느는 느낌은 있었다.


신입생 때 이후로는 딱히 그렇게까지 술을 마실 일이 없다가, 첫 회사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하자마자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마치 데자뷔를 보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한두 살 많은 선배들도 아니고 아버지뻘 상사가 권하는 술이었다. 대학교 선배들보다 이분들 눈에 더 잘 들어야 함은 당연지사. 신입사원 환영한다고 끝도 없이 건네주는 술을 요령도 없이 다 받아마시고, 그 와중에 새롭게 배워야 하는 술자리 매너는 왜 이리 많은지- 이사님 술잔이 비기라도 하면 선배들이 다 눈치를 줬다. 막내가 빨리빨리 술 안 따르고 뭐하느냐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막내로서 그 오만가지 예의범절을 다 챙기느라 술에 잘 취하지도 않았다. 호랑이굴에 물려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산다고, 술을 다 받아마시면서도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는 한계가 점점 늘어갔다. 


다들 어찌나 술을 좋아들 하시는지. 술기운을 잔뜩 섞어 형님 소리도 하고 야 인마 소리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속 얘기도 해야 서로 같이 일하는데 더 도움이 된다고들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다음날이면 그렇게 힘들어들 하면서 저녁이면 또 술자리가 새로 열렸다. 그만 먹고 싶다고 이리저리 빼봐도 어쩔 수 없이 넘겨야 하는 술이 있었고, 갈수록 소주는 쓰기만 해서 술 한 모금 넘기면 물을 두 모금 넘겨야 하는 자리였다. 알코올 냄새만 지독하게 나는 소주가 정말 싫었지만 학생 때와 다를 바 없이 주종은 매번 소주였다. 마음 같아선 내 돈 내고 내 술은 알아서 챙겨다 먹고 싶지만 그럴 선택권도 없는 자리들. 일 년에 한 번쯤은 오만 생색과 함께 와인을 한 병 따거나 비싸다는 중국 술을 사줄 때도 있었지만 이미 원해서 먹는 술이 아닌데 그 맛을 알고 즐긴다 하는 건 사치였다. 


사회생활 5년 차, 이직한 외국계 회사에는 더 이상 회식이 없다. 마음 맞는 사람끼리 술 한 잔 하는 날은 있지만 마시기 싫은 술을 억지로 마신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고 나서야,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억지로 먹는 술이 완전히 사라진 지 한참이 지난 지금에서야, 새롭게 술을 배우고 있는 느낌이 든다. 정확히 말하자면 술을 즐기는 법을. 







더 이상 굳이 술자리를 찾아가거나 만들지 않지만,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면 술이 빠지는 법도 없다. 내가 마실 수 있는 총량을 그간 억지로 먹는 술로 99% 채우고 있었다면 이제는 그 모든 것을 내가 원해서 마시는 술에 쓸 수 있는 느낌이랄까. 술 자체가 그리워 찾는다기보단 주로 맛있는 음식에 곁들이는 '반주'일 때가 많다. 이것저것 조금씩 입에 대보다 보니 나름 취향이라는 것도 생겼다. 칼칼한 한국 음식을 먹을 때면 가끔 소주를 찾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내가 선호하는 반주는 와인. 즐기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해박한 지식도 없고 이런저런 종류를 따져가며 골라 먹는 수준도 못 되지만, 주로 크게 달거나 시지 않은 화이트 와인을 어떤 음식에든 곁들여 먹는 걸 좋아한다. 


특히 이번에 떠났던 열흘 간의 포르투갈 여행에서는 거의 매 끼니 와인을 곁들였다. 여행의 묘미란 낮에도 밤에도 새로운 맛의 식사에 술을 곁들일 수 있다는 데 있으니까. 포르투갈에 간다고 하니 다들 유명한 포트와인 많이 먹고 오라고 손을 흔들어주었지만, 기실 포트와인은 너무 강하고 달아서 그다지 내 취향은 아니다. 실제로도 너무 맛이 세다 보니 포르투갈 사람들도 식사에 곁들여 먹지는 않는다고 한다. 주로 식후주로 한 잔 마시거나 디저트에 곁들여 마신다고. 


포트와인 대신 제일 많이 마신 건 Vinho Verde(비뉴 베르데)라고 하는 일명 그린 와인. 직역하면 Green wine이지만 그 색깔과는 관련이 없어 주로 화이트 와인과 잘 구분이 가지 않는 투명한 색을 띠고 있다 (물론 레드나 로제 와인도 나온다고 한다). 의역하자면 Young wine에 가까워, 긴 숙성을 거치지 않고 수확 후 6개월 이내에 바틀로 만들어진 와인을 일컫는다고. 원래 포르투갈의 북부 지방인 Minho 지역에서 생산되던 와인으로, 현재는 아예 그 지역을 중심으로 Vinho Verde 생산지가 따로 정해져 있다고 한다. 그러니 포트와인과 마찬가지로 포르투갈에서만 생산되는 독특한 와인인 셈이다. 


첫 식사에 곁들인 Vinho Verde


첫 식사에서부터 그린 와인을 한 병 시켰는데, 단맛보다는 신맛이 약간 강하고 약하게나마 스파클링이 느껴졌다. 달지 않고 깔끔한, 어떤 음식에도 잘 어울릴 만한 맛. 내가 주로 즐기는 달지 않고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들과 비슷하면서도 좀 더 가볍고 청량했다. 유난히 해산물 요리가 많은 포르투갈이라 그 뒤로도 레드보다는 화이트 와인을 곁들일 때가 많았고 우리는 주저 않고 그린 와인을 주문했다. 과일향이 조금 더 풍부한 것도 있고 신맛이 더 강한 것도 있었지만 모두 뒷맛이 향긋하고 깔끔하여 음식과 페어링 하기 무난했다. Vinho Verde 생산지에는 유난히 소규모 농장들이 많아 그 종류도 맛도 다양하다고 하는데 더 다양하게 마셔보지 못해 아쉬울 따름. 짐이 무거워 와인을 여러 병 챙겨 넣진 못했지만 결국 그린 와인은 꾸역꾸역 한 병을 사들고 돌아왔다. 새롭게 발견한 취향의 영역이니 무리를 해서라도 한 병 챙겨 올 밖에. 





어째 딴 길로 새서 그린 와인 맛있다는 소리만 늘어놓은 것 같지만, 이렇게 어떤 술이 제일 맛있고 뭐가 내 취향인지 논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놀라운 일이다. 술이라는 거 대체 왜 마시는지 모르겠다고, 맛도 없고 건강에도 안 좋은 거 그만 좀 먹고 싶다고 소리 지르던 불과 몇 년 전의 나를 기억하기 때문에. 아마 대학에서도 회사에서도 술을 잘못 배운 탓이 아닐까 싶다. 그때는 술이라곤 그저 소주 (아니면 소맥)뿐인 줄 알았다. 음식과 함께 찬찬히 음미하는 법, 기분 좋은 순간에 가볍게 곁들이는 법은 배우지 못하고 그저 부어라 마셔라 취할 때까지 욱여넣는 법만 배웠기도 했고. 식사에 술을 곁들인다기보다는 술에 안주를 곁들이는 모양새였으니 안주도 집히는 대로 욱여넣기 바빠서 음식과 술의 마리아주 같은 건 만화 <신의 물방울>에나 나오는 줄 알고 살았었다.


이제와서야 새롭게 술을 알아가고, 술에 대한 내 취향을 알아가고 있다. 나는 그린 와인이 좋고 너는 위스키가 좋고 너는 술이면 다 싫고 너는 맥주가 좋고, 술도 결국 음식이라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고 모두의 취향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온니 소주는 제발 그만...). 다행히 요즘에는 각자의 취향을 적절히 존중해가며 타협할 줄 아는 사람들과만 술자리를 함께하고 있고. 


어떤 술이든 건강에 안 좋은 건 똑같다지만, 요즘 들어 새로 배우고 있는 술은 적어도 정신건강을 해치지는 않는다. 원하는 만큼만 한두 잔 곁들이기에 중간중간 RU21이나 상쾌환 같은 걸 씹어먹으며 억지로 간을 활성화시킬 필요도 없고, 다음날 변기통을 붙잡고 다 게워낼 정도로 마실 필요도 없다. 마시고 싶은 만큼, 마시고 싶을 때에, 맛있는 식사에 맞춰 곁들인다면 술은 충분히 훌륭한 기호식품이 된다. 내 음주량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면 취해서 떡이 되기보다 약간의 취기로 기분 좋은 정도에서 밤을 마무리할 수도 있다. 열흘 간의 포르투갈 여행이 즐거웠던 것도 맛있는 음식에 더해 취향에 딱 맞는 술이 있어서, 좋아하는 친구와 따뜻한 볕과 예쁜 하늘 아래서 맛난 술 두어 잔 홀짝이고 같이 웃을 수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유난히 억지로 술을 먹고 먹이는 문화가 한국엔 여전히 진하게 남아 있는 것 같다. 술 버리는 법부터 시작해 술 빨리 깨는 법, 술 많이 마시는 법 등등, 굳이 일생에 필요 없어야 할 많은 교훈들도 같이 넘실넘실. 다들 이미 술 많이 마시는 데는 도가 텄으니 이쯤에서 잠시 멈추고 새롭게 술을 배워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무조건 '소주 원샷!' 외치기보다 본인 취향에 맞는 술만, 마시고 싶을 때에, 적당히 마시고 싶은 만큼만 마실 수 있다면- 모두가 훨씬 더 즐거워질 테니까. 술도 취향입니다. 이제 좀 존중해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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