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번째 한 글자 주제, 술
얼마 전, 약 열흘간 포르투갈을 다녀왔다.
여행 가기 전 계획은 딱 세 개였다. 포르투갈의 해변에서 서핑을 해보겠다는 것, 빵을 잔뜩 먹겠다는 것,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빵'의 어원은 포르투갈어 pão이라고 한다 - 그리고 한 시도 혈중 알코올 농도를 낮추지 않겠다는 것.
실제로 포르투갈은 술 마시기 아주 좋은 나라였다.
싸고, 맛있고, 만나기도 너무 쉬웠다. 식당에서 곁들여 먹는 하우스 와인이 잔으로 1-2유로, 병으로도 10-20 유로면 아주 만족스러운 한 병을 마실 수 있다. 와인도 맥주도 샹그리아도 실망스러운 적이 없었다. 또 거의 모든 곳에서 술을 판다. 식당이나 와인바는 물론이고 카페에 가도 와인, 맥주, 칵테일까지 파는 곳도 아주 많다. 아주 이른 아침만 제외한다면 어느 시간에 어디에 가더라도 한 잔 하고 있는 사람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어 신경도 전혀 쓰이지 않았다.
게다가 여행 간 곳에서 할 일이라곤 실컷 즐기는 것뿐이니 나는 내 목적과 의무에 따라 식전주, 반주, 식후주를 알차게 챙겨마셨다. 그리고 오늘의 글은 어느 때에 어떤 술을 골라먹었는지에 대한 자랑이다.
에피타이저로서의 식전주보다는 식간주(식사 사이에 마시는 술)에 대해 얘기해보려고 한다.
그러니까 약간 늦은 점심을 하기 전 간식 타임이라던지, 점심과 저녁 사이에 들른 카페나 바에서 마실만한 술. 이럴 때 술을 한잔 먹는다는 것은 내게 약간의 허기는 채워주면서 입을 리프레시해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낮 열두 시 반이라던가, 오후 세네시쯤에는 양치한 지 시간이 좀 지나 입도 뭔가 텁텁하니까. 또 친구와 한참 떠들고 나서라면 목도 좀 마르니까. 뭔가 산뜻하면서도 시원한 것이 먹고 싶어 진다.
포르투에서 오전 내내 워킹 투어를 하고, 의도치 않게 만난 탑을 올라버리고, 우연히 유명한 서점을 찾아 한참을 돌아다니느라 만 오천보 정도를 걸었을 쯤일까, 마제스틱 카페에서 포트 토닉을 만났다.
포트 토닉은 흔히들 포트와인이라고 알고 있는 달달한 주정강화 와인에 토닉을 섞어 만든 음료수다. 포트와인은 도수가 세지만 토닉과 섞은 포트 토닉은 아주 가벼웠다. 술이 들어갔으니 칵테일이라고 부르는 게 맞나 싶으면서도 꼴깍꼴깍 마시기 좋아 음료수 같은 느낌이었다. 이 시간 이렇게 목이 마를 때, 한국에 있었다면 쿨 라임 피지오를 마시거나 레몬이라던지 라임이라던지 자몽이라던지하는 시트러스 향 탄산수를 마시겠지만, 이곳에 포트 토닉이 있어 얼마나 행복하던지! 빨대로 죽죽 들이키다 보니 마르던 목도 조금 지쳤던 머리도 시원하게 뚫리는 느낌이었다.
여행에서의 가장 큰 즐거움은 뭐니 뭐니 해도 역시 음식이다.
일상에서는 접해보지 못하던 음식을 먹어보거나, 조금 더 팬시한 공간에 용기 내서 가본다거나, 혹은 낯선 곳에서 뜻밖의 익숙한 맛을 접하는 재미. 이 모든 것이 음식 자체의 맛을 한층 더 돋워주는 조미료가 된다. 곁들이는 술 한잔의 역할도 대단하다. 내게 주는 이 자극을 한층 더 증폭시켜주니까, 맛에 흥까지 더해준다.
반주로 곁들이는 술이라면 역시 음식의 흐름을 깨지 않으면서 흥을 돋워주는 음식이 제일이다. 녹진한 맛을 먹었을 때 입을 깔끔히 씻어주면서도 그다음 한 입을 위한 식욕을 돋워주는 맛. 맥주라면 IPA라던가 스타우트, 포터를 좋아하면서도 음식과 함께 할 땐 라거류를 찾게 되는 이유도 비슷하다.
포르투갈에 가기 전, 가서 무엇을 하면 좋겠냐는 질문에 그린 와인 실컷 마시기라는 대답이 있었다.
그린 와인이라니, 더 초록빛이 도는 와인일까 짐작만 하다 리스본에 도착하자마자 방문한 첫 레스토랑에서 비노 베르데 (Vihno Verde)를 시켰다. 아주 예쁜 라벨의, 거의 투명할 정도로 연한 화이트 와인이 나왔다. 평소 먹던 화이트 와인들보다 크리스피하고 새콤하면서도 아주 가벼운 맛. 우리는 음~ 을 연발하면서 맛을 봤다. 식사사와 같이 마시기에도 끝 맛이 진하지 않아 물처럼 한 병을 후딱 비워버렸다.
찾아보니 그린 와인은 짧은 시간 동안만 숙성을 시킨, 포르투갈 방식으로 만든 어린 와인이라고. 그 이후로도 우리는 식사를 할 때면 그린 와인에 꽂혀 그 리스트에서만 꼬박꼬박 골라대곤 했다. 상큼한 맛에 침은 돌고, 도수는 낮아 부담 없이 마시기 좋던 와인. 반주하기 딱 좋은 술이었다.
식후주는 만족스러운 식사의 여운을 기분 좋게 이어주는 술이 되어야 한다. 식사 중 곁들인 와인으로 약간 알딸딸해졌다면, 너무 무리해서 취하게 하지는 않으면서도 그 알딸딸하니 신나는 기분을 기분 좋게 끌어줄 수 있는 술. 향이 약간은 짙어 그 여운을 입 안에서 찹찹 거리면서 즐길 수 있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다.
리스본에서 포르투로 넘어가는 날, 기차를 타는 산타 아폴로니아 역 근처의 한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짭짤한 농어구이와 문어밥에, 인심 좋게 그득 따라주는 하우스 와인을 곁들이고는 알딸딸한 채로 계산을 하러 나왔다. 곁들인 와인이 마음에 들어 와인병 무더기를 힐끗대고 있자니, 주인 할아버지께서 계산을 하다 말고 뒤를 돌아 등 뒤 진열장에서 술 한 병을 들었다. 그러고는 에스프레소 잔만한 작은 유리잔에 한잔씩 주면서 더 마시고 싶지? 라며 찡긋 웃었다. 리스본 전통 체리주라는 진자(ginja)였다.
너무 독할까 봐, 그리고 다른 와인을 마셔대느라 리스본에서의 마지막 날까지 한 번 맛보지 못한 진자였는데 이렇게 맛보게 되다니. 친구와 소주잔 넘기듯이 꼴깍 삼키고는 둘 다 눈이 동그래졌다. 포트와인 같은 느낌이면서도 체리향이 나고, 그렇다고 감기약 같지는 않은 신기한 맛, 입에서는 독하지 않은데 둘 다 얼굴이 확 붉어지는 게 느껴질 정도로 도수는 있어 한참을 더 깔깔대며 역으로 걸어갔다. 그때의 날씨, 레스토랑 안의 분위기, 옆에 앉아있던 얌전한 아기와 장난을 곁들이면서도 친절 가득한 주인 할아버지와 디저트로 곁들인 플랑까지, 아주 오래 여운을 남겨줄 훌륭한 마무리였다.
생각해보면 식전주, 반주, 식후주를 모두 즐길 수 있는 환경이라는 건 정말 멋지다.
주변에 저렴하면서도 맛있는 술이 많아야 하고, 그걸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니까.
사사리 꽤나 오랜 기간 술을 '취하기 위해' 마신 적이 있다. 취하면 기분이 좋을 거라고, 힘든 일을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마셨다. 하지만 그렇게 마시던 술은 다음날 숙취가 되어 나를 괴롭히거나, 기억도 가물가물한 흑역사를 만들어내곤 했다. 오히려 힘든 일이 더 생각나게 해 괴로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여유롭게 맛있는 술을 골라마신다는 건 다르다. 느슨한 시간대의 입가심 한 잔은 생활에 흥을 불어넣고, 식사 중 가벼운 한 잔은 음식 맛을 돋우고, 즐거운 식사 후 한 잔은 기분의 여운을 남겨주니까. 하루하루 매 순간의 행복을 증폭하고, 추억하게 해 준다.
참 즐거운 여행이었다. 그리고 또 조만간 맛있는 술을 마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