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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화 Dec 08. 2019

영화 <윤희에게>: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

열여섯 번째 한 글자 주제, 눈


* 영화의 줄거리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눈이 가득 쌓인, 그러나 여전히 눈이 계속 내리고 있는 오타루에서 시작한다. 쥰(나카무라 유코)이 주소까지 써놓고도 차마 보내지 못했던 편지를 고모인 마사코(키노 하나)가 몰래 부쳐버리는 순간. 우체통을 지나며 한번 멈칫, 한 마사코는 결국 총총 뒤돌아가 편지를 우체통에 쏙 넣어버린다. 그리고는 다시 눈 쌓인 길을 자박자박 걷는다. 아,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 중얼대면서.


그렇게 윤희(김희애)에게 보내진 편지를 먼저 뜯어본 것은 윤희의 딸 새봄(김소혜)이다. 지친 엄마에게 살가운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빙빙 곁만 맴돌던 딸은 그 편지를 곱씹고 또 곱씹는다. 세상의 따뜻하고 몽실몽실한 것들은 수십 년 전에 다 잃어버린 양 어두운 얼굴로 그저 생활을 떠받치고 있는 엄마로서의 윤희. 이렇게 힘들게 살 거면 왜 아빠와 이혼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왜 사냐는 말에 자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산다는 양 말을 흐리는 엄마. 저 멀리 일본에 그런 엄마를 20년째 그리워해 온 옛 애인이 있다. 아마 새봄은 그 편지를 통해 처음으로 제 지친 엄마로서가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윤희를 엿본 기분이었을 테다. (그 뒤로도 전 여정에 걸쳐 새봄은 한 걸음씩 윤희에게 더 가까워진다. 제가 들고 다니던 카메라가 윤희가 대학 진학을 포기하는 대신 받은 선물이라는 것도, 윤희의 카메라 쥐는 폼이 자연스럽다는 것도, 윤희가 담배를 피운다는 것도, 윤희의 웃는 얼굴이 아름답다는 것도 모두 그제야 처음 알게 된다.)


그래서 새봄은 오타루로의 여행을 계획한다. 윤희와 쥰을 만나게 해 주려는 야심 찬 계획이다. 그 사이 윤희 역시 쥰의 편지를 읽는다. 20년 간 편지를 썼지만 한 번도 부치지 못했다는, 네 꿈을 종종 꾸곤 한다는 고백, 얼마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근황.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리움을 더는 참을 수 없었다고, 뭐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질 때가 있지 않냐고 쥰은 썼다. 그것이 윤희에게도 기폭제가 되어 윤희는 그간 꼭 형벌처럼 얹고 있던 삶을 처음으로 내려놓는다. 생계를 지탱하던 공장 급식일도 포기하고, 왜 그렇게 힘들게 사냐는 전 남편에게서 등을 돌리고, 기찻길 옆을 따라 다부지게 걷는다. 오타루로 가기 위해.


그래서 다시 영화는 오타루로 돌아온다. 눈이 잔뜩 쌓인 길가, 그럼에도 때때로 다시금 내리곤 하는 눈발. 윤희는 겨우 용기를 내 쥰의 집 앞까지 찾아가지만 인기척에 급하게 몸을 다시 숨기고 만다. 눈은 계속 쌓이는데 윤희는 좀처럼 한 걸음을 더 내딛지 못한다.










영화는 결코 과거의 시간을 비춰주지 않지만, 눈이 쌓인 고요한 풍경에 기대 조금씩 윤희와 쥰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20년 전 둘은 연인이었다. 동성을 사랑한다는 이야기에 윤희는 정신병원으로 보내져야 했고, 쥰은 이혼한 부모님 중 제게 더 무관심해 보이는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돌아왔다. 윤희는 오빠가 정해준 남자와 결혼해 새봄을 낳았으나 서로를 오래 버티지 못하고 이혼했다. 버거운 생계를 혼자 겨우 꾸리며 퇴근길 담배 한 대로 피로를 푼다. 쥰은 수의사 일을 하며 독신으로 산다. 지나가는 말이라도 결혼이나 연애에 대한 질문이 던져지면 히스테릭하게 반응하고, 고양이 말고는 같이 사는 고모에게도 곁을 많이 내주지 못한다. 엄마가 한국인이라는 사실 역시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 헤어진 뒤로 윤희는 끝없이 스스로를 부정하며 살아왔고 쥰은 언제나 스스로를 숨기며 살아왔다.



그럼에도 둘은 여전히, 서로의 꿈을 꾼다.



오타루의 설경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미장센이 되지만, 잔뜩 쌓여 걸음걸음을 조심하게 하는 눈을 보며 나는 내내 윤희와 쥰의 마음을 떠올렸다. 매일 저녁 치워도 아침에 되면 다시 쌓여 있는 눈. 마사코는 여느 날처럼 눈을 치우며 또 한 번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 하고 중얼거린다. 아무리 치우고 또 치워도 금세 또 쌓여버리니, 자연이란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거라며. 쥰은 오타루에 계속 살았으면서 뭘 새삼스레 불평이냐고 고모를 타박하지만 곧 자신이 할 테니 쉬고 있으라고 팔을 걷어붙인다. 열심히 치운 보람도 없이 금세 다시 쌓이는 눈. 20년이 꼬박 지나도 매일 밤 눈을 치우는 일은 좀처럼 편해지지 않듯이, 윤희를 그리워하는 쥰의 마음도 꼭 그것과 같았을 테다. 아무리 다잡으려고 해도 어느  구석에서 계속 소리 없이 쌓여 어느새  귀퉁이를 무겁게 차지하고 마는 마음. 평소보다 조금 흔들리는 날이면 어쩐지  이상은 참을  없을 만큼 무겁게만 느껴지는.


어떤 감정은 꼭 내리는 눈과도 같아서 소리 없이 그렇게 무게를 더하는 모양이다.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라 인력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일, 그 물꼬를 틀어막기 위해 각자 부단히도 애썼을 윤희와 쥰의 20년이 보지 않아도 보이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렸다. 그래도 쥰에게 마사코가 있고 윤희에게 새봄이 있어 그 사이에 작은 다리가 놓인다. 둘의 노력에 힘입어 윤희와 쥰은 결국 재회한다. 어지럽게 교차하는 눈빛 속으로 그동안 서로의 마음에 쌓였던 눈이 단번에 우수수 쏟아져내리는 것만 같다. 끝없이 내리던 눈이 드디어 그친다.






영화의 시작이 쥰의 편지였다면, 영화의 끝은 윤희의 답장이다. 가득 쌓였던 눈을 다 털어내고 한국으로 돌아온 윤희. 이 길의 끝에 뭐가 있든 더 이상은 벌 받듯 억지로 살지 않겠다며 삶을 마주하는 태도를 바꾼 윤희. 새봄과 함께 서울로 올라온 윤희는 처음으로 직접 이력서를 쓴다. 비슷한 지점에서 가까스로 용기를 내 쥰에게 답장도 쓴다. 부칠 수 있는 용기까지 끌어모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꼭 이미 인이 배긴 사람처럼 영화 내내 속내를 잘 털어놓지 않던 윤희가 최초로 하는 고백.


추신, 나도 네 꿈을 꿔.



꼭 눈이 쌓이듯 시종일관 조용히 끌고 온 감정이 마지막 한 줄에 모두 응축되어 결정으로 남았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여운이 길게 남는 영화다. 언제고 기회가 닿는 대로 몇 번이든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은 영화. 어떤 감정이든 너무 깊게 쌓여 발이 푹푹 빠지는 날이 오면 이번엔 나도 하늘을 올려다보게 될 것 같다.  아 정말이지,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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