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 번째 한 글자 주제, 눈
*영화 줄거리와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로맨스 지수 ★★★★★
여운 지수 ★★★★★
고양이 지수 ★★★★★
- 올해 겨울, 잔잔한 로맨스 영화를 찾는다면 바로 이 영화.
+) 아니 그리고 김희애 님이 나오시는데 믿고 보지 않으면 무엇을 믿고 볼 텐가!
최근에 본 영화는 편지로 시작해서 편지로 끝났다. 그리고 그 편지의 첫 문장은 이러하다.
윤희에게, 잘 지내니?
최근에는 특별한 날이어야만 편지를 쓰지만 어렸을 땐 참 편지를 많이 썼다. 친구 생일이면 몇 장씩 빼곡하게 글자를 늘어놓고는 했다. 정성을 보인답시고 전지를 사다가 채운 적도 있다. 편지의 내용보다도 편지의 양이 중요하다고 믿은 적도 있다. 고등학교 자습실 옆칸 친구와 쪽지를 주고받느라 문구점에 가서는 항상 포스트잇을 한 움큼 사 오곤 했다. 호주로 유학을 떠난 친구에겐 이메일을 썼다. 특히 멀찍이 떨어져 있는 친구에게 오랜만에 보내는 편지의 시작은 나 또한 항상 이 인사말이었다.
잘 지내니.
때로는 잘 지내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또 때로는 잘 지냈으면 하는 마음으로 적는 질문. 잘 지내는 와중에도 나를 기억해줬으면 하는 욕심도 조금 뿌려져 있는 인사말이었다. 준이 윤희에게 적어 보내는 첫마디도, 나랑 비슷한 마음이었을까. 참 흔한 인사말인데도 애틋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말이었다.
윤희는 지친 얼굴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일찍 일어나 일터로 나가는 봉고차를 타고, 회사 급식실에서 국을 퍼주고 가져가는 직원들이 흘린 국물을 닦는다. 퇴근하고는 인적 드문 전봇대 근처 구석에서 담배를 피운다. 윤희의 한국에서의 삶은 한없이 추워 보인다. 빨갛게 타오르는 담배 불빛이 온기의 전부일 것 마냥, 썰렁하고 외로워 보였다.
그러다 편지를 발견한다. 사실 딸 새봄이 먼저 발견하고는 잘 보이도록 둔 편지다. 잘 지내니로 시작해서 편지의 이유를 “뭐든 참을 수 없어질 때가 있어서”라고 적은 그 편지를 읽고 윤희도 참을 수 없어진 모양이다. 휴가를 내려다 홧김에 일을 그만두고 눈이 가득한 오타루로 새봄과 함께 떠난다.
오타루는 눈이 한가득이다. 그 소복한 질감 탓일까, 참는 것을 그만두고 떠나온 길이라서 일까 난로 앞에 이불을 둘둘 말고 누워있는 모습이면서도 한국에서보다 훨씬 포근해 보인다. 윤희와 새봄, 새봄과 윤희는 같이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한다. 눈을 헤치고 서로 몰래 쥰을 만나보러 가기도 한다. 눈은 계속 내리는 탓에 항상 하얗고 소복하다. 눈에 대한 마음도 괜스레 사르르 녹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생각해보니, 눈이 포근하다는 생각을 한지 좀 되었다. 어딜 꼭 가지 않아도 되는 시점에야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조심하지 않고 다녀도 될 때 눈이 재미나다고 생각했다. 생긴 건 포근하면서도 손끝은 뜨겁게 달아오르게 할 정도로 차갑다는 게. 닿는 느낌은 아삭아삭 하다는 게. 그래서 눈을 보면 괜히 맨손으로 뭉쳐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새 눈을 가장 처음 밟고 싶다는 마음에 괜히 들뜨곤 했다. 한동안 귀찮고 미끄럽고 불편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눈이라, 설레는 마음을 가져다준 존재라는 게 새삼 옛날 일이라 느껴지면서도 새봄과 윤희와 눈이 참 포근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 내레이션은 윤희의 답장이다. 아마도 오타루로 떠나기 전, 아직 떠날 용기를 내기 전에 적었을 이야기들인 것 같다. 혹은 항상 마음속에 간직했을 이야기들일 수도 있다.
너한테 이 편지를 부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나한테 그런 용기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용기를 내고 싶어.
추신, 나도 네 꿈을 꿔.
새봄과 윤희는 서울로 이사한다. 새봄은 새로운 학교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고, 윤희는 새로이 하고 싶은 일을 만든다. 영화 초반에서의 팍팍하고 차갑던 삶과 다르게, 윤희의 삶에는 용기라는 게 생겨나 한껏 따뜻해진 느낌이다. 스스로에게 벌을 주며 살아왔던 윤희도, 스스로를 숨겨오며 살아왔던 준도 오타루 눈 밭에서의 재회 이후 한껏 따뜻해졌기를 같이 바라게 된다.
봄과 함께, 그리고 윤희의 '새 봄'과 함께, 준에게 보내는 답장이 담담한 목소리로 흘러나온다. 네가 있던 그때가 충만했다는 이야기, 용기를 내고 싶다는 이야기, 그리고 추신으로, 네 꿈을 꾼다는 이야기.
때로는 앞에 붙인 모든 말보다 추신에 더 많은 마음이 들어있다. 사실 추신이 편지에서 하고 싶은 말의 전부일 때도 있다. 차마 하지 못하거나, 편지를 적어 내려가는 내내 하고 싶은 말이면서도 하지 못할 말이라 고민하게 되는 말. 그런 말이 있다면 편지를 부치기 조금 전에라도 용기를 내게 된다. 추신이라는 짤막한 문장으로. 나도 네 생각을 한다는, 너도 이런 마음이면 좋겠다는 짤막한 한 마디로라도. 내 삶을 충만하게 했던 네게, 용기를 내고 싶다는 그 한마디를, 꼭 보내고 싶어만 진다.
언제 한 번쯤 눈이 수북이 쌓인 오타루로 가봐도 좋겠다. 계속 계속 내리는 눈에 이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 달을 보며 말해봐도 좋겠다. 쿠지라 같은 고양이 친구를 만나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그런 기분인 영화. 귀엽고 사랑스러우며 따뜻하다.
영화 <윤희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