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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화 Dec 29. 2019

올해의 깨달음  

열일곱 번째 한 글자 주제, 해


짧고 길었던 한 해를 지나 또다시 연말이다. 누구나 그렇듯 연말이 되어서야 이 긴 시간을 반추하고 연초에 세웠던 계획을 점검하게 된다. 내가 올해 초 세웠던 (잘 기억나지도 않는) 수많은 계획 중, 그나마 하나 지킨 것이 있다면 매일 빼먹지 말고 일기를 쓰자던 다짐이다. 물론 정말 매일매일 쓰는 것은 애초에 포기했고 대부분은 주말에 일주일치를 몰아서, 가끔은 이 주 치나 삼 주 치를 몰아서 쓰기도 했다. 그리하여 아직도 밀려 있는 12월의 일기를 제외하면 그래도 1년의 매일매일을 열 줄씩 꼬박꼬박 채워 넣었다.


돌아볼 기록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1월 1일의 일기부터 찬찬히 읽으며 올 한 해 내가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한다. 유난히 다사다난한 한 해였던지라 단순히 기억에 남는 일만 나열해도 하세월이겠으나, 아마 앞으로 잊지 않고 계속 기억해야 할 것은 (따라서 이렇게 또 기록해놔야 하는 것은) 올해 깨달은 것들이 아닌가 싶다. 1년 간 많은 부침 속에 깨달음도 많았으나 세 가지만 기록해본다.  




1. 나는 아직도 나를 잘 모른다



이 부분에서는 정말 놀라운 한 해였다. 나는 어릴 때부터 나 자신이 제일 궁금한 아이였고, 나를 이해하고 싶어서 심리학과로 진학했던 사람이다. 이후로도 각종 심리검사며 심리학 이론이며 심지어 필요할 때는 명리학의 사주팔자까지 빌려와 자아 탐구에 열을 올리던 사람. 그러나 올해 나는 내가 모르던 나를 너무 많이 만났다. 새로운 상황에 던져지면 당연히 처음 보는 내가 등장할 수 있는 건데도 나는 그럴 때마다 매번 당황스러웠다. 나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자신했어서일까. 아무리 나이가 먹어도 내 속에는 내가 모르는 내가 커가고 있음을, 또 내가 이미 잘 알고 있던 나도 내가 모르는 새 조금씩 변함을 이제야 이해한 기분이었다.


친구가 추천해준 심리검사(TCI 검사)와 상담을 진행한 것도 반쯤은 이 아연함 때문이었다. 이미 이것저것 안 해 본 검사가 없기도 하고 성격상 심리상담을 받는 것보다 나 스스로를 탐구하는 게 훨씬 도움이 될 거라고 믿어왔던 주제에 덜컥 상담을 예약했다. 끝까지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갔으나 결과적으로 보자면 올해 가장 잘한 선택 중 하나였고.


무엇보다도 내 안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인정하게 된 것이 가장 큰 성과였다. 예전에는 나 자신을 들여다보다가 스스로의 모순을 직면할 때면 어쩔 줄 모르고 빙빙 돌아가거나 한쪽을 애써 몰아내곤 했었다. 그렇게 애써 일관성을 유지하며 살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내 기질-성격검사 결과를 받아 든 상담 선생님의 첫마디는 이랬다.


소화님은 인생에 정말 모순이 많겠어요.


위험회피 경향은 강하면서 동시에 자극 추구에 대한 욕구도 강한 기질, 친밀감에 대한 욕구는 높으면서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 같은 방향으로 가야 마음이 편할 것들이 영 반대로 가고 있어, 인생 전체를 놓고 봤을 때 항상 이 모순과 싸워야 할 거라는 얘기였다. 심지어 이 모순은 기질에서 비롯된 것이라 마음먹는다고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내 성격을 잘 운용하여 이 모순을 어떻게 다루는가가 인생의 행복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거라고 했다. 개념은 낯설었으나 이것만큼 내 안의 모든 구슬을 일렬로 꿰어 맞춘 이론도 없었다.  


결국  '모순' 존재에 대한 인식과 인정이 많은 것들을 바꿔놓았다. 그렇게 심리학을 공부했다고 하면서 나는 여전히 내가 어떤 일관된 방향성을 가진 존재일 거라고 굳게 믿어왔던 모양이다.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면서도 가끔 새로운 일로 일탈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나를 발견했을 때, 나는 한 번도 그 둘 모두를 내 모습으로 인정해본 적이 없다. 둘 중 하나가 일시적인 것이라고 믿거나 혹은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애써 한쪽을 밟아버렸다. 분명 내가 하고 싶어서 선택한 일이면서 막상 목전에 두면 내가 무슨 생각으로 이걸 하겠다고 했지, 나는 원래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데, 하고 과거의 자신을 탓하는 일도 잦았고. 기질 검사를 통해 나는 결국 그 순간의 모순과 갈등까지도 '나'의 일부임을 깨달았고 끝내는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모든 면에서 마음이 편해지고, 죄책감과 후회가 줄었으며, 결과적으로 자기애도 늘었다. 덕분인지 1년 동안 유난히 새로운 일에 많이 도전했으며 때때로 찾아오는 갈등도 불편해하기보단 포용할 수 있었다. 나를 이해하는 것은 역시 모든 것의 출발점이 된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를 조금 더 많이 이해하려 노력하기를, 그러나 어떤 순간에도 내가 이미 나를 100% 알고 있다고 과신하지 않기를 다짐해본다.




2. 세상에 상식이라는 건 없다



믿었던 사람에게 데이는 것으로 한 해를 시작하여 그 사람과의 일이 상반기 내내 나를 지배했다. 뭐랄까, 내가 타인에게 쓸 수 있는 이해심의 총량을 그 한 사람에게 전부 다 털어 썼는데도 모자라다는 느낌이 들었다. 매일같이 그 사람을 미워하다가 그렇게 누군가를 미워하는 나를 다시 의심하고 증오하고 반성하다가, 그럼에도 다시금 찾아오는 미움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쩔쩔맸다. 그 일이 끝나고 완전히 관계가 끊긴 이후에도 이미 바닥나버린 이해심과 믿음이 쉽게 채워지지 않았다. 물론 그것만을 탓할 수는 없겠으나, 2019년 내내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유난히 엄격하고 예민했다.


그러면서 가장 많이 들먹인 개념은 '상식'이었다. 주로 '아니 상식적으로-'로 시작되는 타인이나 타 집단에 대한 비난.

상식적으로 저러면 안 되지 않아요?
아니 진짜 상식적으로 이게 말이 돼요?


조금이라도 내가 이해 가능한 범주에서 벗어나 있으면 일단은 딱지를 붙였다. 상식의 범위는 여기까지, 근데 저 사람은 상식에 바깥에 있으니 이상한 사람. 그러나 '상식'이라는 말을 쓰면 쓸수록 게슈탈트 붕괴 현상이 일어나는 듯했다. 상식이란 대체 무엇인가.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어떤 지식이나 이치가 상식이라면 그 범위는 대체 누가 정하는가. 세상 사람이 정말 모두 같은 상식 체계를 가지고 있다면 애초에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나는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저 사람은 상식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기고 이런 비난이 성립한다.


그러니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간다고 말할 때 나는 사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이해가  간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상대를 비난할 수 없게 된다. 내가 알고 있는 상식과 네가 알고 있는 상식의 범주가 다를 때 그것이 꼭 상대의 잘못이라고는 할 수가 없는 일이니까. 내가 남들보다 상식의 범주를 과도하게 넓게 잡고 있을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세상에 진정한 의미의 상식이라는 건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상식은 아주 가까운 사이나 집단 안에서 이미 서로의 체계에 대한 이해와 공유와 합치가 충분히 일어났을 때나 쓸 수 있는 말이다. 내게 상식인 것이 저 사람에겐 상식이 아닐 수도 있다. 결국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다 비슷비슷한 상식 체계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종종 바깥 어드메에서 나와 상식 체계가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나더라도 지나치게 놀라거나 지나치게 당황하거나 지나치게 비난하지는 말아야겠다. 대단한 이해심이나 포용심의 발현은 아니고, 그럴 때마다 놀라고 당황하고 비난하는 게 결국은 나를(또는 나만) 힘들게 한다는 걸 이젠 너무 잘 알게 되었으니까.




3. 일이 바쁘고 몸이 힘들수록 반대로 뻗어나가야 한다.



작년 8월쯤 시작한 요가를 올해도 꾸준히 했다. 워낙에 유연성이 없고 근력도 부족한 나라서 운동으로서 지속하는데도 의미가 있지만, 확실히 요가는 마음수련으로서의 의미도 있음을 깨달은 해였다. 딱히 명상의 효과를 믿어본 적도 없고 같은 의미에서 마음수련으로서의 요가도 반신반의해왔으나- 실제로 하루에 한 시간이나마 세상에서 떨어져 나와 순전히 내 호흡에만 집중하면서 움직이는 게 효과가 있었다. 놀랍게도.


일 년간 쓴 일기를 되돌아보니 그래도 나름 꾸준히 요가에 갔다. 어느 순간부터는 본능적으로 몸이 알아서 그런지, 회사에서 치이고 사람 때문에 힘들어질 때면 기를 쓰고 무리를 해서라도 요가에 갔다. 운동이란 하루 하면 하루 쉬는 거라고 2n년간 굳게 믿어왔던 내가 때로는 4일 연속으로도 요가에 가고 아침저녁으로도 요가에 갔다.




앞으로 한 시간 동안은 온전히 매트 위에 서있는 나에 집중합니다.
생각이 떠오르면 흘러가게 두시고,
마음이 멀어지려고 하면 다시 내 호흡으로 가지고 옵니다.


수련을 시작하기 전 매일 나지막이 일러주는 선생님의 말을 들으며 첫 호흡을 길게 빼낸다. 유난히 생각도 걱정도 많은 나라 한 순간도 머리가 쉬는 적이 없었는데, 그렇게 한 시간을 보내고 오면 머릿속에 부옇게 떠돌아다니던 것들이 조금은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나면 생각도 명징해지고 외부를 바라보는 시선도 차분해진다. 방금은 내 인생을 전부 망칠 것처럼 달려들던 회삿일이나 나를 괴롭히던 사람도 어쩐지 저 멀리로 멀어진다. 그 모든 것들이 생각보다 크게 의미가 없었음을 문득 깨닫게 된달까. 내가 지금 여기 숨을 쉬고 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중요한 게 없다고, 이 순간 누구도 나를 위협할 수 없다고.


물론 요가는 딱 1시간이고 번잡한 일상은 23시간이라, 이렇게 힘들여 가라앉힌 마음은 금방 붕붕 뜨고 만다. 다시금 혼탁해지고 어지러워지며 어제 나를 괴롭히던 일은 오늘 또다시 나타나 나를 (더) 괴롭힌다. 그러나 올해 깨달은 것은, 그럴수록 더더욱 반대로 기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일에 매몰될수록, 그래서 몸이 축날수록, 머리 싸매고 그 혼란 속에 누워있기보다 온 힘을 다해 반대편으로 기어가야 한다. 가서 내 몸을 반대로 쭉쭉 늘려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한쪽으로 쪼그라든 몸이 금세 일상의 수레바퀴 아래 탈탈 구르고 마니까.


반대로 뻗어나가는 길이 꼭 요가에만 있지는 않겠으나 적어도 내게는 딱 알맞은 수련이라고 생각한다. 우연한 소개로 요가를 만나게 되어 그저 감사할 따름. 2020년에는 단순히 힘든 일상을 가라앉히는 것을 넘어서, 요가를 통해 내 마음의 지평을 조금 더 넓힐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해를 반추하고 소소한 깨달음이나마 적어볼  있었던 것은 그래도  년간 꾸준히 글을 써온 덕택이다. 내년에도 열심히 살며 꾸준히 적기로 한다. 2020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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