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재택근무로 인한 유아기 취향으로의 퇴행
말 못 하는 쬐깐한 애였을 때 내 별명은 대표적으로 떡순이와 둘리가 있었다, 고 엄마에게 들었다. 어린애들의 별명이 대개 그렇듯 아아주 직관적이다. 떡순이는 떡을 지나치게 좋아해서 떡순이였고 둘리는 양볼이 빵빵한 모양이 둘리 얼굴을 닮았다고 해서 둘리였다. (둘 다 내가 말을 못 알아들을 때 별명이라 다행이지 아니면 좀 상처 받을 뻔했다.) 기억도 안 날 때의 일이지만 엄마의 말을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종종 먼 친척 어른이나 부모님의 오랜 친구분들과 "어머 나는 얘 꼬맹이 때 보고 처음 보네"류의 만남을 가지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그분들이 내 소싯적 별명을 언급하셨기 때문이다. "얘가 그 떡순이야? 어머 세상에!"라고도 하셨고 "너 어릴 땐 둘리같이 빵빵했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날씬해졌어!"라고도 하셨고... 어떤 식이든 그 별명이 존재했다는 증거는 이미 차고도 넘쳤다.
그 두 별명이 비슷한 시기에 공존했다는 것을 근거로 추론하자면, 볼이 빵빵해진 것도 8할은 떡 때문이었지 싶다. 놀림받을 정도였는지는 결코 몰랐지만 어린 내가 떡을 와구와구 먹던 장면들은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따뜻하고 몰랑몰랑한 백설기가 제일이었고 (색을 입힌 무지개떡이라면 금상첨화), 깨가 잔뜩 들어간 꿀떡 (분홍색과 하얀색만 먹었고 쑥색은 골라냈다), 말랑한 절편 (역시 하얀색만 먹고 쑥색은 거부), 약간 포슬포슬한 술떡, 비록 호두를 골라내야 했지만 약밥, 추석에만 먹었지만 송편 (콩 들어간 거 말고), 콩고물을 흘려서 매번 혼났지만 인절미, 씹을수록 단맛이 나는 가래떡까지- 어린애치곤 가리는 떡도 별로 없고 좋아하는 떡은 많았다. 어릴 때 그렇게 과자를 안 먹어서 엄마가 걱정할 정도였다는데, 심심한 입을 다 떡으로 달랬던 모양이다.
소문날 정도로 유별났던 떡사랑은 나이가 들며 자연스레 나를 떠나갔다. 물론 더 이상 떡을 좋아하지 않았느냐면 그건 아니다. 여전히 떡을 좋아했고, 눈 앞에 떡이 있으면 자연스레 집어 들기 일쑤였으며, 그 선호도도 어릴 때와 거의 비슷했다. 더 이상 쑥떡을 골라내지도 않았으니 오히려 범주가 더 넓어지기도 했다. (송편은 여전히 깨 들어간 것만 좋아하지만.) 그러나 요즘 어디 떡이라는 것이 오며 가며 쉽게 집어 드는 간식거리인가. 과자를 안 좋아했다던 어린애는 일하다 지치면 편의점에 가서 고열량 과자를 잔뜩 집어오는 직장인이 되었다. 군것질이 필요하면 들리는 곳은 편의점 아니면 패스트푸드점이었지 결코 동네 시장의 떡집은 아니었다. 뭐랄까, 마음은 그대로였으나 몸이 점점 멀어졌달까. 그러면서 점점 마음도 잊혔다. (이런 것도 연애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내가 그렇게나 떡을 좋아했던 애였다는 것도 최근에는 잊고 살았다. 그나마 최애인 백설기는 몇 번 '백설기 좋아요!'하고 외친 적이 있어, 회사에서 새 지점 오픈 기념으로 백설기라도 주문하면 팀원들이 두어 개씩 갖다 주는 정도. 그러니까 딱 누가 돌리는 백설기 정도만 가까이하고 산 것이 어언 몇 년째였다.
작금의 사태로 인하여 재택근무를 시작한 지 3주째다. 같은 처지인 모두가 호소하듯이, 하루 종일 집에 있으니 끊임없이 먹게 된다. 아침 먹고 간식 먹고 점심 먹고 간식 먹고 저녁 먹고 야식을 먹는다. 딱히 배가 고프지 않다고 하면서도 입이 괜히 궁금하여 냉장고도 한 번 열어보고 찬장도 뒤져 보고 한다. 이런저런 간식거리에도 지겨워질 무렵, 떡과 다시 재회했다.
역시나 재택근무 덕분에 엄마와 함께 장을 보러 다니는 일이 늘어난 게 시작이었다. 오랜만에 동네 시장을 돌다가 떡볶이 떡을 사러 떡집에 들렸다. 삼시세끼 밥만 먹는 것이 지루하니 떡볶이를 끼워 넣을 참이었다. 떡볶이 떡만 살 생각이었는데. 그 다짐이 무색하게도 좌판에는 백설기를 비롯 가지각색의 떡이 새초롬히도 놓여있었다. 거기에 더해 사장님은 김이 폴폴 나는 가래떡을 철컹철컹 가위로 자르고 계셨다. 이건 뭐 불가항력이지. 엄마의 옆구리를 콕콕 찔러 약밥도 한 팩 사고 백설기도 한 팩 사고 막 나온 가래떡도 두 줄 샀다. 오랜만에 먹는 떡은 여전히 쫄깃하고 맛났다. 가래떡 한 줄의 칼로리가 밥 한 공기를 넘는다더라, 하는 말들도 애써 지우려고 노력하며 신나게 떡을 뜯어먹었다. 거기까지는 그래, 오랜만의 재회 정도로 끝낼 수 있었다.
패배를 인정한 것은 그로부터 불과 이틀이 지난 금요일이다. 점심을 사러 나가는 김에 강아지와 짧게 산책을 했다. 뭘 사다 먹을까, 뭘 먹어야 즐거울까, 계속 생각하며 도는데 머릿속에 자꾸 약밥만 떠올랐다. 이럴 수가. 결국 강아지를 안아 들 즈음에는 결정을 내렸다. 카드밖에 없는 주머니를 들여다보다 ATM기로 들어가 현금을 찾았다. 2020년의 서울, 아무리 동네 시장의 떡집이라도 해도 카드를 받아줄 것 같긴 했지만... 그냥 그게 맞는 것처럼 느껴졌다. 강아지를 둘러업고 꾸역꾸역 시장으로 갔다. 약밥만 살 생각으로 왔지만 사장님은 또 가래떡을 자르고 있었고, 나보다 먼저 오신 분은 따뜻해 보이는 시루떡을 사고 있었다. 망할. 결국 약밥 한 팩과 가래떡 두 줄과 시루떡 한 팩을 사들었다. 칠천오백 원이었다. (천 원짜리와 동전이 가득한 돈통이 나와 있어 현금을 찾아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편의점이었다면 천 원짜리도 카드로 긁었을 테지만 여긴 신성한 떡집이었으니.)
집으로 돌아와 떡으로 점심을 때웠다. 에스프레소 한 잔을 내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곁들였다. 아직 따뜻한 가래떡을 예쁘게 썰어 조청에 찍어 먹었다. 팥고물을 흘리지 않게 조심하며 시루떡도 반 장을 잘라먹었다. 애초에 약밥이 먹고 싶어 떡집에 간 거였는데 배불러서 약밥까지는 못 먹었다. 아마 이미 칼로리는 밥 한 공기를 넘기고도 남았을 거다. 꽤나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남은 떡은 굳지 않게 잘 갈무리해두었다. 그 모습을 보고 누가 나를 다시 떡순이라고 불러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겠다 싶었다. 그렇다. 나는 재택근무라는 급격한 환경 변화에 맞닥뜨려 혼란스러워하던 나머지, 그만 다시 떡을 사랑하게 되어버린 거다. 이미 졸업한 지 오래라고 여겼던 별명을 나 스스로 다시 붙이게 된 거다. 유아기로의 퇴행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사건이므로 이렇게 기록한다.
그리하여 오늘 지금 이 순간, 또 약밥을 먹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금요일에 사 온 약밥은 아니다. 그건 어제 먹었고, 방금 강아지랑 산책을 나갔다가 또 한 팩 사 왔다. 점점 늘어나는 몸무게를 생각하며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이번엔 딱 약밥만 사 왔다. (다시 떡순이가 되었다고 해서 다시 둘리까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천오백 원. 지난번에 현금을 많이 뽑아둬서 다행이었다. 아마 곧 또 뽑아야겠지. 떡순이는 곧 또 떡집에 가야 할 테니까!
* 사진 출처: 시정종합월간지 서울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