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의 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화 Dec 31. 2021

충분히 계획적이니 충동적으로

2021년을 보내며 


2021년에 쓴 글이 0편. 읽은 책은 (그나마도 최근에 들어서 읽은 것이 전부로) 3권. 올초부터 운동을 다녔지만 일주일에 한 번을 겨우 가기가 예사였고 그나마도 5월과 8월과 10월엔 한 달을 통째로 미뤄뒀었다. 여행은 제주도로 짧게 한 번. 강아지와 하는 산책 빈도도, 좋아하는 사람들과 만나는 일도 줄였다. 납작한 한 해였다.


평소에 주로 시간을 들이던 것들을 가만 노려보다가, 한 줌씩 한 줌씩 거기서 시간을 다시 빼오느라 바빴다. 가운데 깃발을 쓰러뜨리지 않고 조금씩 모래를 가져오는 모래 뺏기 게임을 하는 양. 그러다 균형을 살짝 놓치면 너무 시간을 많이 뺏어온 나머지 깃발이 기우뚱하기도 했다. 운동을 미뤄둔 탓으로 건강이 삐걱거렸고, 잠시 시선을 돌린 동안 개가 아파서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아리기도 했다. 야근을 하지 않았고 일에는 최소한의 시간만 들였다. 뭐라도 좀 더 완벽하게 하려고 공을 들이던 것을 그냥 실수만 없게 하는 정도로 덜어냈달까. 더 마음을 쓰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주변에 늘 미안한 마음을 안고 있었다. 시간이 없어, 미안해, 시간이 없어. 그 말마저도 쉽게 하지 못하고 이런저런 핑계로 도망치며 시간을 계속 모았다. 


그리고 그 시간을 전부 하나의 목표에 쏟아부었다. 





시작은 작년 10월 즈음. 길어지는 집콕 생활을 와인과 영화와 미드로 달래는 것에도 싫증이 나던 참이었다. 충동적인 결정을 내리게 되는 순간을 꽤나 강하게 기억하는 편인데 이번에도 그렇다. 정확히, 약 3주 간 덱스터를 시즌 1부터 시즌 8까지 쉼 없이 정주행하고 난 다음이었다. 마지막 시즌의 마지막 편을 보고 아이패드를 덮으며 반쯤 누워있던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허망함이 몰려들어서 꼭 고장 난 사람처럼 그러고 잠깐 앉아있었다. 뭐 하고 있는 거지 지금. 시간을 허투루 쓸 만큼 쓰고 나서야 번뜩 드는 정신이라니. 


이렇게 계속 미드만 보고 앉아 있을 순 없어. 시즌이 끝날 때마다 허망함에 몸부림치다가 또 가능한 시즌이 많은 미드를 찾아 나서는 여정을 그만 끝내고 싶었다. 드라마 한 편을 봐도 남는 것이 있다고 믿는 나지만 그 순간만큼은 흘러간 시간 끝에 내가 손에 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괜히 소스라쳤다. 


어차피 뭐라도 영상을 볼 거라면 미드 대신에 인강을 보자.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 또렷하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도 않는 소리지만 그땐 참 온전한 해결처럼 보였다. 아이패드를 덮고 노트북을 열었다. 밤이 늦도록 웹서핑을 한 끝에 채 24시간이 지나기 전에 무려 이십몇만 원을 주고 민법 인강을 결제했다. 공인노무사 자격증 시험에 그렇게 덜컥 발을 들였다. 그게 정확히 뭔지도 모르는 채로. 



그렇게 얼떨결에 1년이 시작되었고 1년이 훌쩍 갔다. 다른 모든 것들을 '잠시 멈춤' 상태로 걸어놓고 나는 10년 만에 수험생 모드로 돌아갔다. 물론 공부에만 매진할 수 있었던 고3 때와는 아무래도 달랐다. 일단은 돈 받고 다니는 직장에 하루 8시간은 꼬박 매여있었으니까. 이제는 거기서 번 돈으로 내가 내 개를 책임지고 있으니까. 다 같이 수험생이던 고3 때와는 달리 내 주변 모든 이들의 일상은 또 열심히 돌아가고 있으니까. 


아무리 시간을 아끼고 아껴도 필수적으로 남겨둬야 하는 시간들이 있었다. 여기저기 꽂혀있는 깃발들을 위태롭게나마 세워두기는 해야 했기에. 나름 잘 분산시켜 균형을 잡아둔 일상에 갑자기 수험 공부라는 커다란 조각을 끼워 넣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새로운 균형을 맞추는 데 생각보다 시행착오가 많았다. 정정한다. 모래 뺏기보다는 접시 돌리기를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자잘한 거 몇 개를 빠듯하게 돌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제일 돌리기 어려운 게 하나 더 툭 얹어진 느낌. 다른 접시는 다 깨버리고 하나만 돌려도 힘들 것 같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깨지지 않게 손을 쓰느라 목과 어깨가 내내 뻐근했다. 







MBTI 결과는 여러 번 바뀌어왔지만 마지막 글자는 항상 J다. 그냥 J인 것도 아니고 항상 그래프를 뚫고 나갈 것만큼 높은 수치로 나온다. 계획적인 인간이라는 얘기고 스스로도 절실히 동의하는 바다.  굳이 품을 들이지 않아도 머리 한쪽에서 늘 계획을 세우고 있다. 어떤 종류의 계획이 든 간에. '오늘 저녁에 잠깐 볼래?' 같은 번개 약속을 웬만해선 반기지 않는다. 업무용 체크리스트와 개인용 투두 리스트가 있다. 리스트부터 써두고 하나씩 지우는 일을 좋아한다. 뭘 일단 하려고 하면 계획표를 만들어야 한다. 오늘 하루 종일 집에 있을 거라고 해도 계획이 있다. 첫 해외여행을 갈 때는 엑셀로 일정표를 짰었다. 하루치의 계획만큼 분명친 않아도 일주일 정도는 대강 그림을 잡아두게 된다. 일부러 하는 게 아니라 자동으로 그렇게 된다. 


혼란스러운 것은 이런 성향이 장기전에선 전혀 발휘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정말 계획적인 사람들은 5년 후 10년 후의 계획도 세운다던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을 쪼개고 밟아야 할 단계를 순서대로 착착 나눈다던데. '5년 후 계획이 무엇입니까?' 같은 질문을 받으면 멍해지기 일쑤였다. 5년 후에 뭘 하고 싶은지, 뭘 하고 있을지, 나는 단 한 번도 감을 잡아본 일이 없다. '20년 후의 너는 뭘 하고 있을 것 같아?'라는 질문은 해괴하게까지 느껴졌다. 글쎄, 20년 후의 내가 살아는 있을까. 그런 말로 제대로 된 대답을 피하기 일쑤였다. 


대답을 알 수 없는 이유는 명확하다. 스스로가 계획적이고 안정적인 사람이라고 굳게 믿는 주제에, 나는 인생의 방향을 틀 만한 중요한 결정을 상당히 충동적으로 내린다. 여행지의 호텔을 정할 때는 각 호텔을 다각도로 비교하고 후기를 몇 천 개씩 읽고 나서도 고민하면서, 회사를 바꾸는 일 같은 건 덜컥 결정을 내려버리고 만다. 마음이 끌린다는 이유로. 마음이 이렇게 동하는 데는 뭔가 이유가 있지 않겠냐며. 대학 입시를 할 때 그랬고 전공을 정할 때 그랬으며 첫 회사에 입사할 때도, 그 회사를 나와 지금의 회사로 올 때도 그랬다. 노무사라는 새로운 진로를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룻밤 잘 호텔을 알아볼 때보다 공수를 덜 들였다. 


정보를 얻으려고 기민하게 굴기는커녕 가만히 앉아 쿵쿵거리는 심장만 들여다봤다.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자부해오던 것일랑 홀랑 잊고 갑자기 엄청난 감성파가 되어서는. 몰라, 내 심장이 시키는 일이야, 말리지 마. 그간 나름 가중치를 부여해오던 가족과 친구들의 조언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걱정과 우려도 무시한다. 내 마음이 시키는 일이라니까? 갑자기 내 쿵쿵 뛰는 마음이 모든 결정의 유일한 준거치가 되어버린다. 


그렇게 근 30년을 살아온 경험으로 말하건대, 5년 후의 나는 아마 또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을 테다. 아마 3년쯤 뒤의 내가 또 어떤 뜬금없는 일에 마음이 동하여 방향을 살짝 틀어버릴 테니까. 특히 일에 있어서는 계속 그래 왔던 것 같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올해 얼떨결에 달라져버린 방향이 이를 다시 한번 증명했다. 5년까지 갈 것도 없다. 불과 1년 전의 나는, 내가 노무사가 되겠다며 밤잠을 줄이고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물론 충동적인 결정 뒤에는 다시 고통받는 J형 인간이 있다. 다소 급박하게 결정된 목표를 향해 달리느라 오랜만에 스터디플래너를 사고, 가능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느라 수험생 카페를 들락날락거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부족한 시간의 총량을 어떻게든 끌어모으려고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하고 세밀한 계획을 세우는 J가. 충동적으로 너무 커다란 방향을 설정해버린 어느 날 밤의 나를 좀 원망하면서도, 그래, 그래도 너처럼 이성적인 애가 본능적으로 내린 결정이니 이건 거부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거겠지, 하고 맥없이 나를 믿어버리는 내가. 일단 목표가 세워졌으니 어쨌든 꼭 달성해보겠다고 기를 쓰고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수정하고 지워나가는 내가. 


그러니 올해의 깨달음은 여기에 있다. 

나는 분명히 중요한 결정에 대해 충동적이 된다. 그리고 그건 아무래도, 어떤 결정이든 네 마음이 옳을 거라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따라주는 나 자신을 믿는 덕이다. 그 결정 옳게 만들어주겠다고 기를 쓸 게 분명한 나 자신. 못내 허황된 목표처럼 보여도 그걸 의심할 시간에 그냥 플래너를 월별/주별/일별로 써가며 입술을 깨무는, 바쁘게 기존의 계획을 수정해 새로운 균형을 잡아주는 나 자신. 


나의 계획성을 믿기 때문에 충동적일 수 있다는 모순을 인정하며 한없이 마음이 놓이는 한 해의 마지막. 

충동적 결정을 한 나와 열심히 따라준 나의 합작으로 나는 곧 두 번째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 인생 계획에 없었던, 불과 1년 전에도 예상치 못했던 방향 전환이지만 걱정은 없다. 언제나처럼 나의 선택을 믿어 의심치 않는 내가 든든히 뒤를 받쳐줄 테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