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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화 Mar 23. 2020

2016년 2월부터 2018년 7월까지

에세이 드라이브 4기: 첫 번째 키워드 - 간판  

시작은 2016년 2월, 경기도 화성에서였어. 시작을 이렇게 정확히 기억한다니 거짓말 같겠지만, 어떤 일들은 거짓말처럼 기억에 남더라. 하여간 첫 회사에 입사해서 따악 한 달쯤 넘겼을 때였어. 오리엔테이션이랍시고 신입사원들 몇 명 모아서 여기저기 견학 같은 걸 보냈는데, 그중에 화성에 있는 연구소도 하루 갔던 거지. 지역은 매번 달라졌지만 일정은 다 거기서 거기였어. 모르는 상무님과 모르는 부장님과 모르는 차장님과 모르는 과장님들을 소개받고, 허리 아플 때까지 인사를 하고, 그분들이 설명해주는 이 회사의 유구한 역사와 위대한 목표에 대해 듣고, 들으며 졸고, 졸면 안 되니까 서로 깨워주고, 그러다 다섯 시 반만 되면 다들 짐을 챙겼어. 일찍 나가야 차가 안 밀린다나. 그렇게 차 여러 대에 나눠 타고 그 팀의 막내 사원(이지만 역시 우리보단 높은 사람)이 예약한 고깃집으로 가. 너무 일찍 나왔나 싶을 만큼 거리엔 차가 하나도 없어서 꼭 나는 듯이 고깃집에 도착하곤 했어. 원망스러울 정도의 스피드였지.  


그날은 아마 오리고기였을 거야. 이틀 연속 삼겹살을 먹일 정도로 막 나가지는 않다고 누가 그랬어. 소고기는 뭐 옵션에도 없었고. 하여간 그날도 돼지 아님 오리였어. 그런 디테일은 기억이 잘 안 나. 고깃집에서 하는 회식도, 불 올리기 전에 소주 뚜껑부터 따는 것도 얼추 익숙해졌었는데, 그날 처음으로 엄청 취했거든. 그동안은 나름대로 이리저리 빼고 도망 다녔었어. ‘제가 술을 잘 못 마셔서-’ 하면서 되지도 않는 애교도 떨어보고, 대리님이 알려준 대로 물 마시는 척 물컵에 뱉어도 보고, 화장실 변기 뚜껑 위에 앉아서 5분씩 쉬기도 하고 그랬어. 근데 그쪽 상무님은 레베루가 좀 다르더라고 (나중에 알았지만 원래 유명한 사람이래. 뭐 그런 전력까지 분석할 짬은 아니었지 그땐). 자리 배치부터가 장난 없었어. 내 맞은편엔 상무님 왼쪽엔 부장님 오른쪽엔 과장님이 앉아서 마법의 삼각진 같은 게 생겼거든. 나만 그런 것도 아니야. 같이 간 동기들은 다 비슷비슷한 진법에 갇혔어. 플레이도 엄청났어. 철통 수비를 딱 해놓고 화려한 드리블로 소주잔이 왔다 갔다 하고, 점수 셀 시간도 없이 골이 팡팡 터지고. 도망갈 구멍도 없었어. 눈알을 휙휙 돌려봤지만 우리 팀은 쪽수도 적고 너무 무력했어. 국대랑 붙은 조기축구회 같았지. 서로 도움을 줄 수도 받을 수도 없었어. 중간에 메시 같은 사람들이 다섯 명씩 앉아서 탁탁 끊어버리니까. 메시랑 같은 팀인 상무님은 껄껄 즐거워하고. 굿 게임이었던 거지 한 마디로.     


하여간 그래서 취한 거야. 모르는 새 뭐가 툭 끊긴 거지. 2차를 노래방으로 갔는데, 어떻게 갔는지도 기억이 안 나. 그러니까 취한 거지. 기억이 다시 시작되는 건 한창 노래방이 달아올랐을 때부터야. 막내 사원이 맨발의 청춘을 틀었고 상무님이 자연스레 마이크를 받았어. 그게 그들만의 코스였나 봐. 여전히 이름이 헷갈리는 부장님과 차장님과 과장님들은 전주가 나오자마자 구두와 양말을 벗었어. 원래 맨발의 청춘은 맨발로 부르는 거라나. 우리 보고도 빨리 다 벗으랬어. 남자애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벗었는데 여자애들은 다 스타킹이었거든. 겨우 한 달 된 신입이었으니까, 살색 스타킹에 검은색 힐. 맨발은 될 수 없었지만 일단 힐은 벗었어. 다행히 노래가 시작해서 그쯤에서 넘어갔어. 상무님이 일어섰으니 아무도 앉아 있을 수 없어서 우리도 앞으로 나갔지. 누가 맥주를 쏟았는지 금방 발바닥의 스타킹이 축축하게 젖었어. 으. 맨발인 남자애들이 차라리 부럽더라고. 언감생심 휴지 찾을 정신까진 없었어. 엉거주춤 서서 누가 던져준 탬버린만 열심히 흔들었지.      


이 노래만 끝나면 화장실로 튀어야지. 아직 희미한 정신을 그 생각에만 집중하고 있는데, 맨발의 청춘이 끝나자마자 무슨 블루스 메들리 같은 게 이어졌어. 노래방엔 또 노래방의 메시가 있었나 봐. 그 흐름이 아주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어. 노래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하여간 그 전환이 진짜 자연스러웠단 건 기억이 나. 하긴 상무님이 “부루쓰 타임~” 하기 전까지는 그게 블루스인 것도 몰랐지만. 옆에 있던 부장님이 내 어깨를 붙잡았어. 아 맞다, '부루쓰' 타임이랬지. 탬버린 안 든 손으로 나도 부장님 어깨를 살짝 짚었어. 박자가 엉망이라 그렇게라도 지탱하지 않으면 꼬꾸라질 것 같았어. 이런 게 블루스인가. 아직 축축한 스타킹에 신경을 집중하며 바닥을 디뎠어. 엉거주춤 엉거주춤. 꼴이 웃겼을 텐데, 다들 술과 블루스에 취해서 웃지 않았어. 뻣뻣하게 무릎 바운스를 주다 보니 젖은 스타킹이 점점 더 찝찝해졌어. 그렇게 점점 술이 깨는 것 같았어. 그제야 점점. 와, 그날 진짜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건지 모르겠어.           


그래서 그날이 처음이었어. 노래방 일정이 끝나고 나는 동기 하나랑 제일 먼저 1층으로 도망 나왔어. 다들 양말부터 구두까지 찾아 신고 화장실도 갔다가 계산도 해야 해서 시간이 좀 걸렸거든. 찬 바람에 술도 다 깬 것 같았는데 동기가 보기엔 아니었나 봐. “너 괜찮아? 많이 마셨어? 괜찮아?” 계속 묻더라고. 나는 괜찮다고 했어. 근데 동기가 안 믿더라고. 자꾸 너 많이 마셨지, 너 많이 취했지, 그랬어. 이제 와 생각해보니 걔도 취해서 그랬던 걸까. 하여간 내 말을 믿지 않으니 어쩔 도리가 있나. 어떻게 나의 멀쩡함을 증명할까. 눈을 가늘게 뜨고 고깃집과 노래방밖에 없는 동네를 둘러보다가... 간판을 읽기 시작했어. 야 봐봐, 나 진짜 멀쩡해. 내가 저거 다 읽어볼까. 서, 래, 갈, 비. 키, 토, 산, 오, 리, 고, 기. 백, 프로? 무, 항, 생, 제. 거봐, 나 잘 읽지. 고, 래, 노, 래, 방, 신, 바, 람, 노, 래, 방. 잘 읽지? 나 존나 멀쩡하지?          



읽을 간판은 차고도 넘치지. 그런 골목에는 특히 더.



그때부터였어. 그 뒤로도 자주 기억 안 날 만큼 마셨고 그런데도 집이 아니라 노래방으로 가야 했거든. 코스는 상무님이 짜는 거고 나는 상무 비슷한 거라도 되려면 30년은 더 있어야 했으니까. 그렇게 먹여놓고도 다들 정신 놓지 말라고 잔소리들을 했어. 취했냐, 정신 똑바로 차려라, 눈 똑바로 떠라. 뭐 개중에 괜찮냐고 걱정해주는 언니들도 있었지만. 누가 묻든 나는 "넵!" 하고 히히 웃었어. 고개를 몇 번 흔들고 눈을 꽉 감았다 뜨면서, "저 괜찮습니다!" 했어. 근데 그걸 누가 믿어줘야 말이지. 그러니까 또 간판을 읽어 보이는 거야. 태, 백, 산. 탑, 스, 타, 노, 래, 방. 왜 하필 간판이었냐고? 모르겠어. 눈앞에 붙잡고 설 만한 게 그 단단한 명조체 글자들밖에 없어서였을까. 아, 이제 괜찮아. 이 주사는 2018년 7월에 고쳐졌어. 응, 저절로 그냥 고쳐지더라고. 맞아. 사실 내가 그 회사를 관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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