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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화 Apr 05. 2020

우리에겐 지금 제대로 된 법이 절실하다

스물네 번째 한 글자 주제, 법


지난달에는 여러 번의 청원을 했다.


청와대에 했고 국회에 했다. 텔레그램을 기반으로 한 대규모 성착취 사건, 이른바 'N번방' 사건에 대한 처벌을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용의자의 신상을 공개하라, 가해자 전원의 신상을 공개하라, 철저하게 수사하고 처벌해라, 그러기 위해서 법을 제정하고 강화해라... 눈에 들어오는 것마다 꼬박꼬박 찾아가 청원 동의를 눌렀다. '동의합니다' 한 줄 남기는 일은 간단했다. 금방 끝났다. 그것이 꼭 무력함을 상징하는 것 같아 마음이 쉽게 무너졌다. 계속 파고들수록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지만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았다. 한 명이라도 더 알 수 있도록 공유하고, 같이 싸우자고 설득하고, 지지와 연대의 말들을 붙여 넣고, 제발 여기 더 신경 써달라고 권력에 호소하는 일. 분노를 어떤 추동으로 삼아 실질적인 행동을 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무력감이 문제였다. 너무 많이 패배해왔기 때문에. 이번에야말로 바꿔보자고 소리를 지르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선 내가 내 족쇄를 풀지 못했다. 너 하나 이런다고 바뀌는 거 없어. 그 말을 실제로 듣기도 했지만, 시시때때로 비슷한 류의 말들이 내 머릿속에서 공명했다.


사건이 큰 만큼 여느 때보다 목소리가 커지긴 했다. 동아줄 붙잡듯 했던 청원도 거센 여론을 보여주는 데 효과가 있기는 했다. 이른바 '박사방'의 운영자라는 조주빈의 신상이 공개되었고, 그간 성범죄에 비교적 유한 처벌을 한 것으로 악명이 높던 오덕식 판사가 교체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앞이 깜깜하다. 여전히 이들을 처벌할 법적 근거가 미비하다고 한다. 이미 'N번방' 사건에 대한 기존 청원으로 인해 성폭력 처벌법 개정안이 국회 법사위를 통과한 바 있으나, 사건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도 없이 졸속으로 처리되어 필요한 내용을 전혀 담지 못했다.



그렇게 법을 졸속으로 처리할 당시 국회 법사위에서 오고 간 대화가 이렇다고 한다. 사건에 대한 몰이해와 무관심을 여실히 드러내는 발언들.




이 나라의 입법과 사법 권력의 주류는 기성세대 남성이 쥐고 있다. 그들이 이 사태에 대해 보이는 태도는 여전히 무관심에 가깝다. '텔레그램'이라는, 본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플랫폼이 이용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을 가지고 마치 이것이 생소한 범죄라도 되는 양 이야기한다.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범죄가 생겨났으며 이를 주동한 가해자들은 우리와는 다른 악마의 집단이라고 선을 긋는다.


그러나 N번방은 결코 빈 땅에서 태어난,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범죄가 아니다. 그동안 계속해서 이어져왔던 성폭력과 성착취가 기술의 발전을 통해 새로운 형태를 취하게 되었을 뿐이다. 우리의 일상과는 관계없이 일어난 악마의 범죄인 것도 아니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여 희롱하는 것이 만연했던 사회는 이미 그 자체로 충분한 토양이 되어주었다. 각종 성범죄를 강력하게 처벌하지 않았던, 직장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성폭력을 묵인했던, 성매매 행위에 가담하는 것으로 의리를 쌓았던, 철저히 일방적인 포르노를 소비하고 불법 촬영된 성관계 영상을 공유했던 모두가 지금의 N번방을 만들었다. 조주빈을 '악마'로 지칭하고 그의 개인사를 통해 그가 왜 악마가 되었는지에만 주목하는 일부 언론이, 가해자의 '창창한 미래'를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 처벌 수위를 낮추는 법정이, 총선을 앞두고 거대한 표심을 잃을까 우려한 탓인지 호기심을 운운하는 국회의원이 여전히 진짜 문제를 가리고 서있다.



모두가 발을 빼느라 정신이 없다. 그러나 누구도 이 담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출처] 한겨레 그림판, 3월 26일







이러다 나중에 당신 아들이 야동 한 번 보고 징역 살게 될지도 몰라. 온라인에서 이런 협박도 보았다. N번방에 대한 처벌을 촉구하고 법안 강화를 이야기하는 글에 달린 댓글이다. 이들은 계속해서 26만 명이라는 숫자가 과장이라는 사실에 천착하고, 일방적인 '페미'여론에 휩쓸려 법이 바뀌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계속해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중심이 아닌 주변으로 돌려보려는 행위다. 비슷한 맥락에서 (그러나 아주 교양 있는 양 점잖게) 과잉 입법에 대한 우려를 슬쩍 내보이는 남성들도 보았다.


물론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며, 법으로 모든 도덕을 포괄할 수는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다. 강력한 법을 제정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도, 그래서 앞으로도 갈 길이 멀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말 그대로 법은 '최소한'을 지켜야 한다. 이런 경우에는 법이 '최소한'을 정하기도 한다. 법이 처벌하지 않으므로 범죄로 인식되지 않는 영역이 실재하고, 그로 인한 피해가 계속해서 반복되는 한, 단순히 일부의 비뚤어진 성 관념이나 도덕의식으로 문제를 축소할 수는 없다.


과잉보다 부족을 걱정해야 하는 시점이다. 그 잘못된 도덕의식이 여기까지 침범하기 전에 먼저 선이 그어졌어야 했다. 여기가 최소한의 지점이라고, 제대로 된 법을 만들어 철저하게 선을 그어줬어야 했다. 그동안 선을 넘은 무수한 이들이 아무도 처벌되지 않는 것을 보았으므로 다음 세대도 따라서 선을 넘는 것이다. 희미하기만 한 선 위를 마음껏 넘나들며 쾌락을 좇는 거다. 이전보다 더 자극적이고 교묘한 방식으로 넘었다고 해서, 우리와는 다르다고 발을 뺄 때가 아니다. 그 영역을 완전히 방관해 온 법이, 무수한 몰카 범죄와 소라넷에 이어 N번방을 만든 것이므로.



온라인 성범죄에 대한 제재와 처벌 수위가 매우 약한 것도 10대 가해자의 죄의식을 무디게 했다. 유승진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사무국장은 “n번방 사건이 공론화되기 전에도 수많은 온라인 성폭력 사건이 있었지만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받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며 “범죄를 저질러도 걸리지 않고, 걸려도 처벌받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사회가 10대들에게 준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갓갓’으로부터 n번방을 물려받은 ‘켈리’ 신모(32)씨는 지난해 11월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텔레그램에서 ‘고담방’을 운영하며 1만 건 넘는 성착취물을 유포한 ‘와치맨’ 전모(38)씨에 대한 검찰 구형도 징역 3년 6개월에 그쳤다.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자 검찰은 지난달 말 부랴부랴 보강 수사에 나섰다.

[출처] "10대 가해자 수두룩한 ‘n번방’… 처벌수위 약해 죄의식 무뎌", 국민일보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지금 제대로  법이 절실하다. '법대로 하자'는 것은, '법정에서 보자'는 협박은, 피해자가 마지막으로 의지할 수 있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제대로 된 법 아래에서 피해자는 보호받고 가해자는 처벌받아야 한다. 어째서인지 요즘은 어디 법대로 해보라는 비아냥가해자의 입에서 나온다. 어차피 기껏 해봤자 집행유예니까 걱정하지 말고 계속 영상을 소비하라는 가해자들의 글을 게 되고, 시키는 대로 반성문   썼더니 충분히 감형되었다는 가해자들의 자랑을 듣게 된. '법대로 하자'는 말이 가해자의 손에 들어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우리가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그은 선이, 우리의 법이,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편에 가깝다는 것을 시사한다.


N번방 사건이 이슈가 되고 여론이 들끓자 경찰에서도 행정부에서도 어떻게든 강력 처벌을 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지만, 여전히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현행법상으로 온라인 성범죄를 처벌할 수 있는 근거가 부족한 데다, 처벌하더라도 양형기준이 낮아 정말 엄벌에 처할 수 있는지는 미지수라고 한다. 그러나 비관론에 기대어 이번에도 그저 주저앉을 수는 없다. 그렇게 넘겨왔던 모든 것들이 쌓여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으니까. 오히려 비관적이기만 한 상황에 더더욱 분노하고, 그 분노를 모아 힘을 만들어야 한다.


더 이상 침묵하지 말자. 어차피 바뀌지 않을 거라고 포기하지도 말고, 나는 N번방에 들어간 적 없으니 상관없다고 도망치지도 말자. 법 권력의 주의를 이곳에 집중시키기 위해선 우리가 계속해서 여기에 집중해야 한다. 이게 문제라는 걸 인지할 수 있도록 계속 보여주고 들려줘야 한다. 그렇게 똑바로 직시하는 일이 아무리 불편해도 나는 눈을 돌리지 않으려 한다. 적어도 이 문제에 있어서 결코 방관자가 되지 않으려 한다. 그래야만 피해자가 되는 일도 막을 수 있을 테니까. 우리 모두 계속해서 문제를 똑바로 쳐다보자. 그 시선의 힘으로 제대로 된 법을 만들자. 우리에겐 지금, 제대로 된 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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