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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화 Mar 22. 2020

내게 시간을 조금만 더 주련

스물세 번째 한 글자 주제, 개


내 개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만 열다섯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딱 일주일 되었을 때다. 기숙사 학교였으므로 새로운 방에서 월화수목금 딱 4박 5일을 자고, 첫 주말을 맞아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집에는 개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처음 보는 개는 아니었다. 우리 집에 오기 전에 이모네 집에서 이미 몇 개월을 지냈기 때문이다. 이모가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 가정 분양을 받아서 데려와 원룸에서 혼자 키우다가, 개가 이상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침대며 바닥이며 똥과 오줌을 싸놓고 하루 종일 짖었다고 한다. 원룸에 혼자 두고 주인은 하루 종일 직장에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그 사람은 두 번 생각도 않고 개를 버리려고 했단다. 보호소로 보내기 직전이라는 얘기가 돌고 돌다가, 건너 건너 아는 사람이었던 이모가 얼결에 데리고 온 거였다. 이모는 이미 다섯 살 된 말티즈 한 마리를 키우고 있었고 걔는 수컷 얘는 암컷이었으므로 같이 키울 생각을 했댔다. 보호소로 넘기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일이었다. 문제는 이모 역시도 두 마리를 다 건사할 재력과 여유는 없었다는 것. 어디 보낼 데가 없을까 끙끙대던 차에 딱, 마침 열다섯 먹은 딸을 기숙사로 보내 집에 어딘가 휑해진 우리 엄마가 레이다에 걸린 거다. 엄마는 순간의 결정으로 그 개를 우리 집으로 들였다. 순하다고 해서, 이름은 순이가 되었다.


여기까지의 과정에서 개에 대해 잘 알고 개를 키운다는 것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던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심지어는 개를 이미 키우고 있던 이모조차도 그랬다. 몇 년 사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때만 해도 이렇게 펫 사업이 활발히 돌아가고 있지도 않았고, 강형욱 같은 사람이 나와서 개 얘기만 하는 TV 프로도 상상할 수 없었다 (기껏해야 동물농장뿐이었지). 다행히 엄마는 순이를 근처 동물병원으로 데려가 필요하다는 예방접종 몇 개를 맞히긴 했지만 거기까지가 다였다. 엄마의 개 키우기에 대한 지식은 그로부터도 10년 전 시아버지가 마당에 키우시던 진돗개와 같은 분이 모란시장에서 5천 원씩 주고 사와 손주들에게 안겨줬던 강아지들에서 멈춰있었다. 당시 엄마의 역할은 사료를 챙겨주고 똥을 치워주는 게 다였었고, 이번에도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좋은 사료 나쁜 사료에 대한 개념조차 없을 때라서 당연히 마트에서 사 온 사료를 먹였고 같이 산 싸구려 간식을 가끔 주었다. 밥을 주고 예뻐해 주는 것만으로 개에 대한 의무가 끝났다고 여겼다. 산책도 자주 데려나가지 않았고.  


엄마가 잘못했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때는 아마 대부분 그랬을 거다. 한참 요크셔테리어의 유행이 지나고 막 말티즈 유행이 시작되려는 때였다. 반려동물이라는 단어보다는 애완동물이라는 단어가 모두에게 익숙하던 시기였고. 엄마가 몰랐다면 나라도 좀 더 잘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도 못했다. 평일 내내 기숙사에 있던 나는 주말에나 순이를 만났다. 물론 한없이 예뻐했지만 그게 다였다. 그때는 개똥을 치우는 것도 어딘가 이상해서 으으으 하면서 휴지를 두껍게 겹쳐 겨우 치우곤 했었다. 개는 꽤 자주 산책을 시켜줘야 한다는 것도 몰랐다. 아아주 가끔 순이를 데리고 나가면 내내 집에서만 살던 개는 산책도 어색해했다. 잔디를 밟지 않고 아스팔트만 밟으려고 했으며, 화장실 타일과 비슷한 대리석 바닥을 밟아야만 오줌을 쌌다. (오줌을 싼 것도 꽤 나중의 일이고 처음에는 밖에 나가면 오줌을 참다가 집에 뛰어들어와서 싸곤 했다.) 어린 나는 그게 좀 특이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뭐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몇 안 되는 지식이라도 인터넷을 뒤져 찾아오는 건 나였고, 뭐라도 이상하다 싶으면 울고불고 엄마 아빠를 붙들고 늘어져 제발 동물병원에 가보자고 설득하는 것도 나였지만 (부모님이 동의하지 않으면 병원에 데려갈 수 없었으니) 그게 다였다. 어렸다는 변명으로 다 덮을 수는 없다. 나는 열여섯이었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개만큼이나 인생에 신경 쓸 일이 아주 많았다. 내신 공부도, 친구와의 말다툼도, 새로 나온 핸드폰이나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도, 심지어는 기숙사에 두고 온 남자 친구도 그 당시엔 너무 중요했다. 개는 내 시간의 전부를 원해 매번 꼬리를 흔드는 데 나는 핸드폰에 머리를 박고 휘휘 손을 저었다. 너에게 나눠 줄 시간은 더 이상 없다면서.








순이는 (추정 나이로) 이제 만 열네 살이다. 그간 강산이 한 번 바뀌고도 3할이나 더 바뀌었다. 그 사이 애완동물은 반려동물이 되었고, 개사료에도 등급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개를 위한 각종 용품이 개발되고 수입되었고... 세상이 바뀌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개를 키우게 되었고 그 돌봄의 정도는 예전과는 차원이 달라졌다. 개를 위한 우유가, 유기농 사료와 간식이, 보험이, 레인코트가 나오는 시대. 개를 잘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여주고 알려주는 프로와 책이 수두룩한 시대. 늦게나마 나 역시 하나하나 챙기고 있지만, 어떤 것들은 이미 늦어버렸다. 많은 것들이 이미 늦어버렸다.


늦은 만큼 남은 시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매 순간 다짐한다 (여전히 매 순간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러나 최선을 다한다는 건 지금에 와선 그저 당연한 일이다. '늦은 만큼 더욱' 최선을 다한다는 건 무의미하다. 내가 지금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그러지 못했던 최초의 몇 년을 보상해줄 수는 없다. 당연한 일이다. 아직 남은 시간이 더 많았다면, 순이가 아직 어린 개였다면 조금은 나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괜찮은 보호자로 성장할 때까지 그저 강아지로 남아주었다면. 내가 스물이 넘고 스물다섯이 넘어 조금씩 더 개에 대해 이해하고, 개를 케어할 수 있을 만큼 자립하는 동안 내 개가 계속 한 살짜리로 남아주었다면.


순이는 이미 노령견의 범주에 들어선 지 꽤 되었다. 사람 나이로 환산하면 이미 여든이 넘은 나이다. 내게는 여전히 어리게만 보이는 얼굴이지만, 어릴 때 보여주던 에너지나 생동감의 많은 부분이 사라졌다. 예전보다 더 깊은 눈과 다양한 얼굴을 하게 되었지만 하루의 대부분 깊게 잠들어 있다. 산책을 여전히 즐거워하지만, 돌아오면 세상 피곤한 눈을 하고 꾸물꾸물 푹신한 곳으로 기어들어간다. 식탐이 많아 이것저것 몰래 먹는 탓에 여러 번 속을 썩였었지만, 이제는 이빨이 없어 웬만한 간식은 씹을 수도 없다. 새로운 것을 같이 해보고 싶은데, 해주고 싶은데, 어떤 것들은 돌이킬 수 없이 늦어버렸다.



"나는 무언가에 애정을 지니는 일이란 세상을 아주 복잡한 방식으로 이해하겠다는 용기라고 생각한다. 그를 사랑하는 순간 우리는 그가 위치해 있는 그 지점뿐 아니라 연결된 배경까지 모두 받아 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 김금희, <서로가 있어 다행인>



한 사람이 오는 건 그 사람의 삶 전체가 오는 것이라 했던가. 사람이 그럴진대, 다른 생명체는 어떠할까. 순이는 내가 알지 못하고 관심조차 없었던 세계를 내 삶으로 끌고 들어왔다. 그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알고 싶지 않았던 것도 알아야만 하게 되었다. 그것이 내가 사랑하는 개가 속한 세계였기 때문에. 그 안에는 끔찍하고 추악한 진실들도, 내가 매일 행동으로 깨부숴야 하는 관습들도 있었다. 그러나 순이가 내게 선사한 세계에는 결국 사랑뿐이었다. 나는 사람이 그저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그것만으로 한없이 행복하고도 불행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고, 내 개에 대한 사랑이 점점 멀리까지 번지는 것을 보았다.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알아야 했고 슬퍼해야 했고 무력해해야 하는 시간들이 있었다. 까만 눈의 개가  한마디 없이 가르쳐준 세계는 넓었고  세상은 그로 인해 달라졌다.


그래서 나는 더욱 후회한다. 흘려보내고만 시절을, 더 깊이 사랑하지 못한 순간들을. 그때는 그런 게 없었다고 말해봐야 변명에 그칠 뿐. 나는 여전히 어렸던 내 강아지에게 미안하고, 모르는 새 나이 들어 버린 내 개가 안쓰럽다. 내게 새로운 세상을 안겨 준 순이에게 그만큼 커다란 세상을 선물하지 못했다는 자책이 선명하다. 내 개는 그저 작고 어려서, 한없이 명랑하고 순수해서, 새로운 장난감 하나도 새로운 세상인 양 기뻐하는 개이기에 더더욱.





여전히 선량하고 순진무구한 내 개, 순이야.

준 만큼 받지 못하고도 원망 하나 없이 나를 올려다보는 내 천사.

이미 늦어버린 것들에 대한 아픔은 내가 끝까지 안고 있을게, 부디 지금 이 순간 너의 세상이 꽃밭이기를.

지나버린 시간을 되찾을 수는 없어도, 네 안에 더 멋진 세상이 켜켜이 쌓이도록 노력할게.

그러니 내게 시간을 좀만 더 주련, 내 어리고 늙은 강아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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