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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미니 Nov 17. 2020

너도 늙는다

퇴근길 현관문을 열자마자 다급한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가스불이 안 켜진다고, 밥솥 코드가 먹통이라며 당장 무슨 큰 일이이라도 난 것처럼 소란이다. 신발도 가방도 대충 벗어놓고는 뭐야 또.. 짜증을 살짝 얹어 퉁명스럽게 대꾸하고 말았다. 분명 원인은 존재하고, 이 집에는 엄마뿐이었으니 범인은 뻔한대도 당최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엄마는 그렇게 주방에 서 있다. 해결 방법을 찾는 것은 또 나의 몫이다. 차단기가 내려가 있는데 올려보니 자꾸 튕긴다. 결국 관리사무소에 연락했고 직원들이 찾아와 여기저기 뜯어보고는 금세 문제점을 찾아냈다. 원인은 어항 물갈이였다. 물을 퍼내고 새 물을 넣는 과정에서 아일랜드 식탁 전기 콘센트에 물이 좀 튄 듯했다. 전기배선이 가스레인지와 오븐을 같이 연결하고 있어서 가스불까지 잠겨버린 것이었다. 점심때까지 멀쩡하던 게 왜 갑자기 안되냐고 나는 아무것도 손댄 것이 없다고 펄쩍 뛰던 엄마도 혹시 오늘 어항에 물 갈아주셨어요?라고 묻는 직원의 말에 순간 동공 지진을 일으키더니 중얼거리며 말끝을 흐린다. 어항이 지저분해서 물을 갈아줬는데.. 물 안 흘리고 깨끗하게 했는데... 


어른이 되니 스스로 할 줄 아는 것도 아는 것도 많아졌다. 경력도 경험도 제법 쌓이니 인생의 여유 같은 것도 느끼게 되고 후배들에게 조언도 할 줄 아는 위치가 되었다. 모르는 것에 대한 불안함은 다양한 경로로 해결한다.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에서 헤엄치다 보면 필연적으로 나에게 꼭 맞는 유튜브 유 선생님을 만나게 된다. 지인들과의 카톡창과 가입한 카페들만 잘 활용해도 실시간으로 공유되는 알짜 정보들을 쉽게 얻는다. 이렇듯 일상의 문제들은 별 어려움 없이 해결된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다. 아직까지는 세상의 변화 속도에 발맞추어 걸어갈 수 있다. 뛰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신문물이 들어오면 가끔은 버벅대도 어찌어찌 또 터득해가면서 스스로 대견해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엄마가 지금의 내 나이일 때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아니 국민학교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그때 엄마는 나의 든든한 보호자이자 해결사였다. 일흔이 훌쩍 넘은 엄마는 이제 공식적으로는 나의 보호를 받고 있다. 아플 때 나는 병원에 혼자 가는 어른이지만 엄마는 보호자인 나를 동반하는 처지가 되었다. 핸드폰을 바꿔야 할 때, 인터넷 주문이 필요할 때, 계좌 이체를 해야 할 때, 고객센터에 문의 전화를 할 때 엄마는 나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지문 인증을 하고, 기계음의 안내 음성에 따라 상담원을 찾고, 최저가 상품을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일이 누군가에겐 식은 죽 먹기일 테지만 엄마에겐 무섭고 두려운, 시도하고 싶지 않은 도전이다. 온갖 설명문마다 왜 그렇게 영어는 또 많은지 영어교사인 나도 볼 때마다 짜증 난다. 최대한 쉽게 요약해서 설명을 해볼까 하다가도 그냥 내가 수행비서를 자처하고 말지 해 버린다. 나에게도 엄마에게 신문물을 소개하는 일은 무섭고 두렵고 시도하고 싶지 않은 도전이다. 


어른을 넘어 노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인생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며 생각만큼 두려움으로 가득 찬 미지의 세계가 아닐 수도 있다. 곁에서 지켜보는 엄마는 자신이 가장 자신 있고 익숙한 집안일을 할 때를 제외한 집 밖으로 나가는 모든 일에 겁이 앞서고 걱정이 많다. 핸드폰 화면에 있던 문자 아이콘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카톡 대화방이 없어졌다고, 자주 누르던 친구 이름이 주소록에서 없어졌다고 가끔은 정말 엉뚱한 말들로 나를 당황시킨다. 살펴보면 없어지고 사라진 것들은 다 핸드폰 어딘가에 그대로 있다. 나의 잔소리는 그 옛날 엄마에게 듣던 잔소리의 몇 배를 더하여 얹어지고 민망함과 부끄러움은 엄마의 몫이 된다. 요즘 엄마는 이래서 노인들은 젊은 사람들과 가까이 살아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젊은이 속 터지는 심정 몰라주는 우리 임 여사의 당당한 논리에 한편으로는 웃음이 나오고 또 한편으로는 짠한 마음이 든다.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이, 내 늙음도 나의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라고 했던 시어도어 로스케의 말을 떠올리며 잠깐이나마 엄마에게 가졌던 귀찮고 짜증스러운 마음을 지워낸다. 


영어교사가 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를 짓누르는 한 가지 고민은 언제까지 영어교사로 버틸 수 있을까였다. 연륜과 경력이 쌓일수록 인정받는 타 교과와는 달리 영어교사는 나이 민감도가 컸다. 젊고 경력이 적을수록 가장 최신의 영어 교수법, 네이티브 수준의 발음과 스피킹 능력, 가장 핫한 영어권 대중문화 인지도를 장착하고 나타나니 학생들이 누구를 원할지는 뻔하지 않은가. 고군분투하는 선배 영어교사들을 보며 나의 미래를 점쳐보기도 하고 새로운 세대의 후배 교사들을 보며 과연 DNA가 다르구나.. 를 뼈저리게 실감한다. 아직은 버틸만하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다. 나도 엄마처럼 민망하고 부끄러운 일이 많아지면, 무너지는 자존감을 부여잡고 홀로 눈물을 훔칠 날이 올 것이다. 나도 늙는다. 그리고 너도 늙는다. 너무 당연한 사실도 때로는 소스라치게 낯설고 무서울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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