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는 아직 한창인 것 같은데 옛날이야기를 할라치면 30년이란 세월을 건너뛸 때가 있다. 오늘도 시작은 옛날 옛적에 집 근처 악명 높았던 남자 중학교 이야기이다. 사복의 자율화 시절 당시 우리 동네 남학생들의 패싸움은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졌었다. 신발 한 짝은 어디 갔는지 절룩거리며 지나가는 남학생, 코피 쏟으며 뛰어가던 남학생, 먼지 바닥에 굴렀는지 잔뜩 더러워진 옷을 털며 걸어가던 남학생.. 당시 꼬마였던 나는 동네 어귀에서 놀다가 덩치 큰 오빠들이 무리 지어 지나가는 걸 가끔 목격했었다. 그럴 때면 심장이 쿵쾅거리고 겁이 나 숨거나 뛰었다. 어린 나이에 그게 뭔지는 정확히 몰라도 나쁘고 무서운 것. 그 정도는 본능적으로 알았으니까. 학교 폭력은 그때도 만연했고 지금도 성행 중이다. 슬프게도 가해의 종류와 수법이 더 다양하고 교묘하게 진화했을 뿐.
유명인들의 과거 학폭 사건이 국민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한때는 미투가, 빚투가, 그리고 n번방 이슈가 온 나라를 뒤흔들더니 이제는 학폭 차례인가 보다. 연일 폭로 뉴스가 터지고 있다. 사람들의 압도적 비난은 누군가에게는 응분의 대가로, 또 누군가에게는 오해와 억울함의 2차 피해로 이어질 것이다. 이렇게 또 한차례 쓰나미가 지나가고 나면 사람들은 또 망각의 강을 건너고 평화로운 일상이 다시 찾아올까. 이슈는 또 다른 이슈가 덮고 그렇게 삶은 또 계속될 테지. 피해자의 주홍글씨는 결국 지워지지 못한 채.
지금의 학폭 사태가 교사로서 편치만은 않다. 학교 폭력이라는 것이 학교에서 일어난 폭력 사건 아닌가. 10여 년 전의 사건들이 다시 소환되고 피해자들이 억울함을 토로하는 것은 사건 발생 당시 제대로 된 처벌과 보상, 치유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맞은 놈만 억울하다는 만고 불변의 진리가 여기서도 증명되는 셈이다.
폭력의 범위는 굉장히 광범위하다. 폭행뿐만 아니라 피해자가 느끼는 언어적, 정서적 괴롭힘과 온오프라인의 모든 생활 반경 안에서의 폭력 행위를 아우른다. 학교는 다양한 예방교육을 통해 폭력 발생의 가능성을 낮추고 위기학생을 지원하기 위한 특별 교육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갖추고는 있다. 그러나 그 실효성을 묻는다면 여러 현실상의 어려움을 끼워 넣을 수밖에 없다. 가장 큰 딜레마는 바로 교육에 있다. 교육을 담당하는 학교의 존재 자체가 가해자에 대한 엄벌을 방해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학생의 인생과 미래에 대한 교육적 책임을 논할 때 가해자를 단죄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회복'이라는 순화된 용어를 사용하며 개선과 교화를 위한 또 다른 교육을 시작한다. 문제는 이러한 교육적 이상의 실천이 이미 진흙탕이 되어 버린 피해자의 삶에 과연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느냐 이다. 피해자가 바라는 것은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와 재발 방지이지만 그간의 많은 학폭 사태를 지켜보며 축적한 비과학적 데이터로는 가해자가 우연한 실수로 의도치 않게 행한 폭력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학교폭력 당사자의 담임교사라면 일련의 사건이 처리되는 수순을 지켜보면서 인간에 대한 환멸, 제도에 대한 환멸, 개인으로서 느끼는 무기력함.. 이런 경험 한번쯤 해보았을 것이다.
나 역시 두 개의 자아가 있다. 개인으로서 폭력의 가해자는 처벌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회복적 생활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갈등을 조정하고 관계를 회복하는 교육적 희망에 아직은 기대지 못하겠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인권이 훨씬 더 존중받는 사회라는 느낌은 나만 가지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교육의 현장에서 가해자를 영원한 가해자로 바라봐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계속 고민 중이다. By the way, 지금의 폭로 사태가 언젠가 진실은 밝혀진다는 것. 남에게 가한 고통은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것. 인생 함부로 살면 안 된다는 것. 한 번쯤 자신의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는 순기능은 하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