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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미니 Jan 24. 2023

새해 복 만으로는 안돼

날마다 의미부여

 인간은 끊임없이 의미를 탐닉한다. 나는 누구일까. 나의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 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의미 있는 삶에 다가가고 싶어 무던히도 애를 쓴다. 소소한 일상 속 작은 일에서도 우선순위를 부여하고 무엇이 더 나은 선택인지 고민하는 모습은 가치와 의미를 중시하는 인간의 본능적 습성이다. 그래서 남들에게는 쓰레기로 치부될지언정 차마 버리지 못하는 물건 하나쯤 간직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한 해의 마지막 날에는 보신각 종 앞에 모여 새해가 시작되는 카운트 다운을 해야 하고 불과 몇 시간 후에 떠오를 해에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며 바다로, 산으로 새벽 여행을 떠나는 것이 "의미 중독자" 인간이다. 새해 다짐. 신년 계획. 지키지도 못할 약속들을 해가 바뀔 때마다 반복하고 쓰지도 않을 다이어리를 다시 또 구입하면서.

 나도 한때는 의미 중독자였다. 그러다가 내가 의미를 부여했던 수많은 다짐과 약속과 계획들이 해가 바뀌어도 진전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실망과 자책과 후회를 반복하며 의미 무용론자가 되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격렬한 저항의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어느덧 이 생활도 의미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의미 없는 생활이 의미 없어 다시 의미를 찾는 중독의 고리. 

 '그럼 가볍게 등산이라도 하면서 새해 맞이 겸 마음을 다잡아볼까.. 그동안 혼자 산에 간 적은 없었는데... 드디어 진정한 홀로서기인가.. 후훗' 아.. 소름.. 또다시 의미부여 중인 나란 인간. 

 핸드폰으로 검색해 보니 인왕산은 초. 초. 초. 초보 등산러가 가볍게 산행하기에 아주 쉬운 코스란다. 계획형 인간답게 날씨, 동선, 코스, 그리고 근처 카페까지 섭렵해 둔다. 모든 게 완벽하다. 

 날씨는 분명 맑음이었는데 위에서 내려다본 서울 전경은 온통 '흐림'이었다. 게다가 서울의 명소답게 인왕산은 남녀노소, 외국인, 강아지까지 전 지구적 통합의 자리였다. 산을 오르며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고 싶다는 고상한 욕심은 제쳐두고 줄 서서 올라가는 산행길에 주변 등산객들에게 민폐가 되지 않도록 나 자신을 살피는데 신경을 써야 했다. 높지 않은 산인데도 계단을 조금 오르다 보니 내 귀에 심장을 옮겨놓은 것처럼 심장박동 소리가 실감 나게 들렸다. 지나치게 잦은 자체 휴식을 거쳐 누가 보면 환자가 아닐까 싶을 정도의 깊은숨을 고른 끝에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장 높은 바위에 걸터앉아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어쨌든 해냈다는 뿌듯함이 살짝 밀려온다.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즐기려는 그때, "저기요.. 죄송하지만 저희 사진 좀 찍어주실 수 있나요?" 역시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법.

 차갑게 식은 김밥을 먹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꺼내 들었다. 산바람을 맞으며 김밥을 오도독 씹다가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났다. 오늘의 등산은 나의 의미 사전에 무엇으로 기록될까. 뻘짓? 궁상? 나름의 도전? 

 산을 내려와 검색해 두었던 북카페로 향했다. 작년인가 나 혼자 산다에서 파비앙이 방문했던 곳으로 크로와상과 루프탑이 꽤나 인상적이어서 꼭 가봐야겠다고 하던 차였다. 그러나 조용히 커피 한잔 마시면서 진짜 마음 챙김의 시간을 가져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은 처참히 뭉개졌다. 생각해 보면 유명세를 탄 카페에 사람이 몰리는 것은 예상 가능한 일이다. 무슨 자신감으로 나 한 명쯤 앉을자리 있을 거란 안일한 생각을 했던 것일까. 조용히 나 자신에게 집중을 하겠다면서 가장 사람들이 많이 붐비는 장소를 선택하는 오류를 범하다니. 어쩌면 '힙'해 보이는 장소에서 나도 '힙'해 보이는 경험을 하고 있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집 근처에도 산이 있고 동네에 조용한 카페가 수두룩한데 버스를 타고 또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면서까지 굳이 그곳엘 가고 싶었던 이유가 그런 거 아니었을까. 언제부턴가 나의 의미 중독은 깊이 있게 파고드는 수렴의 과정이 아닌 가시적인 경험에 근거한 발산형으로 가고 있다. 나의 일상은 이것저것 해보는 경험의 맛에 취해 진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얕게 더 얕게 흩어지고 있다. 그래서일까. 요즘 들어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 성찰과 통찰은 사라지고 자꾸 경험에 기반한 글쓰기에 의존하는 느낌이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오랜만에 헤드뱅잉을 시연하며 단잠을 잤다. 2만보를 넘게 걸었으니 피곤할 만도 하다. 등산을 통해 오늘 내가 얻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뻘짓이었든 의미 있는 시도였든 오늘 나의 하루가 2023년을 시작하는 나에게 의미 있는 날로 기억되길 소망한다. 세상에 의미 없는 일은 없다는 말이 진부하게 들리긴 하지만 그 속에는 우리가 가치 있는 존재임을 증명하고 싶은 간절함이 묻어있다. 일상을 소중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의미부여는 그래서 중요하다. something이 something special이 되는 것. 올해는 나의 인생에도 있을 그 특별한 무언가를 찾기 위해 속는 셈 치고 다시 한번 열심히 살아보려고 한다. 장기하도 말하지 않았던가. 새해 복만으로는 안된다고. 노력을 하라고. 열심히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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