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은 저기하지 않아
마침내. 코로나에 걸렸다. 전 국민이 걸려야 끝난다고들 할 때 나는 장담했었다. 나는 끝까지 안 걸릴 거야. 그렇게 3년을 버티면서 이상한 오기 같은 게 생겼더랬다. 마스크를 내 몸 같이. 손 소독제를 항상 챙기면서. 가족들이 다 걸려도 나의 철옹성은 무너지지 않아. 괜히 뿌듯했다. 나는 특이체질인가. 무증상이었나. 어떻게 이리 잘 버티지. 그러나 쓸데없는 집착과 오만은 순간의 방심을 놓치지 않는 법. 도대체 어디서. 왜.라는 의문을 남긴 채 나의 격리생활은 시작되었다.
누구나 경험해 보지 않은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걱정이 있다. 언젠가 동료 한 명이 수십 개의 바늘이 목구멍을 찔러대는 것 같았다며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라고 말할 때 나는 잔뜩 겁을 먹었었다. 후유증이 꽤 오래간다며 격리 끝나고도 몸조리 잘해야 한다는 말도 여러 명에게 들었었다. 학기 중 가장 바쁜 시기에 공백이 생기면 동료들에게 민폐가 되기에 만약 내가 걸린다면 언제가 제일 적당할까.라는 말도 안 되는 계획도 세워봤었다. 이쯤 되면 걸리지 않은 게 더 불편하고 부담스러울 지경이다. 버티는 시간이 길어지면 약간의 체념과 함께 마음의 준비라고 할까. 대비라고 할까. 그런 걸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막상 진단 키트에 생긴 선명한 두 줄을 마주하고 보니 정작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몸이 아프면 모든 게 멈춘다.
내 인생을 통틀어 일주일 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연인으로서 본능에 충실하며 살아본 적이 처음이다. 쉬는 것에 대한 불안감, 자기 계발에 대한 집착,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으름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이 항상 나와 함께 했다. 10대 때는 공부하느라, 20대 때는 직업을 얻기 위해, 30대 때는 나의 일터에서 인정받기 위해 쉬지 않고 열심히 살아왔다. 인생은 살아가는 게 아니라 채우는 것이라는 누군가의 말에 감동하며 내 인생의 빈 틈이 생기는 곳을 찾아 열심히 뭔가를 채워 넣으려는 노력이란 걸 했다. 인간에게 주어지는 결코 공평하지 않은 인생의 수많은 조건들 중에서 그래도 시간만큼은 똑같이 배분되니까. 그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라고 합리화하며 여기까지 온 게 아닌가 싶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나만의 비장함으로, 쓸데없는 성실함과 책임감으로 20년을 버텨왔다. 건강 상 크고 작은 시술이 있었을 때에도 나의 고민은 출근과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조직에서 그렇게까지 중요하고 대단한 사람인가. 아니다. 나 없이도 조직은 잘 돌아가는가. 그렇다. 내가 조금 느슨해진다고 해서 누군가 나를 비난하는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류의 자기반성 타임은 아파봐야 온다. 내가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코로나 덕분에 나는 인생 첫 병가를 얻었고 내 인생의 무중력 상태를 경험할 수 있었다. 놀라웠다. 격리로 얻은 잉여의 삶이 생각보다 너무 좋았던 것이다. 물론 아픔에 대한 대가이기는 했지만. 나는 ENTJ로 일을 좋아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고 무언가를 끊임없이 추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롯이 혼자 아무 목표와 계획도 없이 스스로를 방치하며 하릴없이 보내는 그 시간들이 이렇게 편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가치를 끌어내지 않아도, 무의미하게 흘러가도 괜찮은 시간들이 있다. 시간에 대한 강박을 걷어내면 시간은 그냥 시간일 뿐이다.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오는 자연의 섭리. 거기에 온갖 의미와 책임과 노력을 가미하여 그 무게에 짓눌려 사는 건 나의 선택이었을 뿐. 앞으로는 좀 가벼워져야겠다는 생각. 잉여의 삶을 좀 더 지속해도 아무 일 없을 거라는 안심. 노력과 결과와 보상에 집착하지 않고도 내 인생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그런 삶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그동안의 삶의 방식이 헛된 것은 아니다. 이런 성찰도 결국 이제까지 열심히 살아온 자만이 느낄 수 있는 보상 같은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