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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미니 Aug 27. 2023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집단착각. 그리고 콘크리트 유토피아.

“나의 개인적 가치가 나의 부족과 충돌할 때 우리는 세 가지의 선택지와 마주하게 된다. 쫓겨날 각오를 하고 집단에 도전하거나, 제 발로 떠나거나, 혹은 세 번째 선택지를 고려해 볼 수 있다. 그저 집단이 원하는 바에 항복해 버리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집단 착각, 토드 로즈]


 나는 여기에 한 가지 선택지를 더 얹고 싶다. 지금 나의 선택이 항복은 아니라는 자기 합리화. 비판에는 누구보다 적극적이지만 책임질 일은 내 몫이 아니라며 군중 뒤에 숨는 바로 당신. 아니 어쩌면 나.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국가적 재난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우리에게 어떤 지도자가 필요하고 구성원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하게 한다. 지금 당장 물리적인 붕괴가 일어나고 국가 시스템이 무너지는 상황이 아니라고 해서 우리에겐 아직 먼 이야기라고, 우리는 여전히 안전하게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난 한 달간 보도된 뉴스를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소소한 일상이 언제든지 재난의 현장이 될 수 있음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는 서로를 의심하고 경계하며 불안에 떨고 있다. 우리는 사실 “누구에게나 어떤 일이든 발생할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살아간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억울하고 가슴 아픈 일을 겪게 되는 누군가가 나와 내 가족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수많은 재난 영화들이 결국엔 가족을 지키기 위한 가장의 처절한 몸부림을 통해 가족주의를 감동적으로 버무리는 스토리라는 걸 우리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가족 개념을 좀 더 확대하여 아파트 주민이라는 동일 집단의 소속감을 무기로 생존의 자격을 “모두”에서 “우리”로 옮겨 놓는다. 이러다간 다 죽을 테니 일단 우리라도 살고 보자는 본능적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은 그러한 선택이 결국엔 모두를 죽게 한다는 것을 지금 당장은 인정하고 싶지 않다. 함께 잘 살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희생보다 "바로 여기 지금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치러야 하는 희생을 정당화하면서 말이다. 영화 속 인물들의 선택과 행동에 대해 납득하기 어려운 지점들은 분명 있다. 그러나 나라면 저 상황에서 이성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을까. 자신 없다. 결국엔 처음 제시한 세 가지, 아니 네 가지 선택지 중에서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선택을 할 것이고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쳤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혼란을 해결하고 나 대신 싸워 줄 난세의 영웅. 집단의 대표. 지도자에게 의존하게 된다. 돈과 권력이 무력화된 재난 상황에서 말 그대로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 되었는데도 사람들은 다시 그들을 대표할 지도자를 세우고 조직을 정비하고 일한 만큼 보급 식량을 배분하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그 어디쯤 적당한 제도를 만들어낸다. 대표는 나 대신 결정하고 책임지고 희생과 비판을 감수할 의무를 부여받고 그에 대한 대가로 권력을 갖는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결정과 선택의 순간마다 대표가 어떤 지시를 하고 어떤 결정을 내릴지 기대하고 기다린다. 설령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되더라도 우리 자신은 소수 의견일 뿐이며 대세는 우리와 다를 것이라는 잘못된 확신을 가지면서. 생존에 대한 강한 열망은 결국 집단에 대한 소속감, 내부 결속력으로 이어지고 외부와의 연대에 신경과민적인 적대감을 표출한다. 이러한 집단 착각은 불안과 의혹이 증폭되면서 위기감이 고조될 때 집단 광기로 이어질 수 있음을 영화는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혼란이 잠재워지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때 우리는 또다시 네 가지 선택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반복된 학습 경험을 통해 “순응 편향” 할지 쫓겨날 각오를 하고 도전할지 우리는 다시 선택해야 한다. 문득 어느 작가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인류 역사상 전 세계가 이렇게 오랫동안 태평성대를 누린 적은 유례가 없다고. 어쩌면 우리는 디스토피아로 가고 있는 걸까. 집에 오는 길에 빼곡히 서 있는 아파트들을 한 번씩 올려다본다. 어떻게 대비하고 준비해야 하는 걸까. 나는 이렇게 무방비로 살아가도 되는 걸까. 영화가 현실이 될 법한. 여느 공포 영화보다도 무섭고 두렵게 느껴지는 건 나의 신경과민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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