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와 같은 시간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났다.
어제도 엊그제도 늘 같은 시간이다.
어쩌면 습관처럼 성호경을 긋고 앉아 성경을 읽었다.
멍하니 앉아 양치를 하고, 의식의 흐름 없이 옷을 입고,
그저 한 손에 묵주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기도하면서 걷고 뛰었다.
오늘의 기도에 선종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떠올려본다.
그 시간이 내게는 하루의 문턱을 넘는 의식 같은 거다.
집으로 돌아와 역시 새벽을 함께 깨운 신랑과
“잘 잤어?” 짧은 인사를 나누고,
조용히 책상에 앉았다.
오늘은 이훤 시인의 《청년이 시를 믿게 했다》 4월 24일의 에세이로 하루를 시작했다.
“가끔은 모든 게 너무 빠르기 때문이다.”
이 문장을 따라 읽다가
내 걸음을 멈추게 한 또 다른 문장에 오래 머물렀다.
“쓸 거다. 그래도 쓸 거다. 그리고 부지런히 구매할 거다.
시집을 사고 종이잡지도 계속 들이기로 한다.
종이로 된 물성을, 빳빳하게 제본된 책장을 넘기는 일이 아직 기쁘다.
서점에서 여러 권을 펼쳐보고
우연히 만난 책을 들고 나오는 그 과정이 좋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오늘도 출근하고, 아이들을 만나고, 하루를 살아가는 일도 그런 걸까?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아도,
그저 그 ‘과정’ 자체가 나를 다시 숨 쉬게 하는 일.
요즘은 자주 생각한다.
학교도 언젠가는 사라질지도 모른다.
화면 속에서 모든 수업이 이루어지고,
사람과 사람의 체온 없이도 무언가가 ‘진행’되는 세상이 오고 있다.
그런 세상에서 나는,
무엇을 지켜야 할까?
내가 붙잡고 싶은 것은
손끝에 걸리는 질감, 오래 묵힌 종이 냄새,
우연한 마주침 속에 피어나는 대화의 온기,
사람 사이에 흘러가는 숨결의 결이다.
그 모든 것들은
빨리 흐르는 세상이 미처 따라오지 못하는 것들이다.
오래 멈춰 바라보아야만 보이는 것들.
느리고 서툴러서 더 아름다운 것들.
그것들을 지키며 살아가는 하루,
그 하루가 나를 곧게 세우는 줄을 나도 모르게 잡고 있었다.
나는 오늘도 그렇게
‘쓸 거다. 그래도 쓸 거다.’
그리고 아이들이 있는 교실로,
내가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는 그 공간으로,
조용히 나아갈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