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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크림의 빛

by 소화

정혜윤 피디님의 북토크에 다녀왔다.

언제나 그렇듯, 작가님의 말은 단순히 머릿속에 남지 않고,

마음 깊숙한 어딘가에 오래도록 파장을 남겼다.


나는 늘 궁금했다.

왜 정혜윤 피디님이나 은유 작가님처럼 어떤 이의 가장 아픈 순간을,

그토록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글로 쓸 수 있을까.

그 고통을 옮긴다는 건, 그 아픔을 함께 감당하는 일이기도 할 텐데.


그저 세상에 알리고 싶어서?

누군가 알아야 하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날, 피디님은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말했다.

“그 순간이, 그 사람의 가장 빛나는 순간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안에서 무언가 조용히 부서졌다.

‘빛난다’는 말은 나에게 늘 무대 위, 조명을 받은 모습이었다.

찬사와 박수, 주목받는 자리.

그런 것이 빛이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정말 그런 빛만 있는 걸까?

무너지기 직전의 마음, 너무 아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조용히 웅크려 있는 어떤 순간.

그 순간에도, 삶은 여전히 작게 빛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몸을 더 웅크리는 건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지막까지 버티기 위해 힘을 모으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 웅크림조차도 아름답고 찬란한 반짝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이진민 작가의 『모든 단어에는 이야기가 있다』를 읽다가

마음이 또 한 번 뭉클해졌다.


“내던져진 존재들은 오늘도 열심히 구른다.

지금 여기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당신은 충분히 박수를 받을 만하다.”


책을 읽으며 ‘포란’이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었다.

작고 약한 존재를 따뜻하게 품어주는 시간.

그 시간을 품는 일이, 결국 나 자신도 따뜻하게 데우고 살아가게 한다는 것.

그 문장을 읽는데,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래.

그 아이들도, 아픔 속에서 여전히 하루를 살아내고 있는 그 아이들도,

존재 그 자체로 박수를 받을 만큼 빛나고 있는 거였다.


나는 이제야 조금 알게 된 것 같다.

내가 아이들 곁에 서 있는 이유.

단지 아프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 아픔 속에서도 빛나는 순간을 먼저 발견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


그리고 그 빛을 품어줄 수 있는 사람.

포란처럼, 조용히 따뜻한 품을 만들어주는 사람.

나도 그 품을 만들며 함께 데워지고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나는 오늘도 아이들의 삶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는다.

그 삶 안에 깃든 아주 작은 빛을, 가장 먼저 바라보며.

그리고 그런 나 자신에게도, 작게나마 박수를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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