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창가로 비스듬히 들어온 가을빛이 책장 끝을 어루만지는 아침이다.
“선생님, 낮다… 이건 낫다. 뭐가 달라요?” 이제 막 읽기의 문턱을 넘은 아이가 내게 물었다.
한때는 글자를 소리에 맞춰 억지로 묶던 그 아이가, 오늘은 문장의 결을 손끝으로 쓸어보듯 의미를 묻는다.
나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으려 칠판에 작은 선을 그었다.
“산이 높고 낮다 할 때는 받침이 ㅈ이야. 오늘 기온이 높고 낮다처럼 높이나 수준, 온도를 말할 때도 ㅈ.
아픈 게 다 나았다거나 ‘이게 저것보다 낫다’처럼 ‘더 좋다’를 말할 때는 받침이 ㅅ을 쓰지.”
나는 손가락으로 ‘ㅈ’은 아래로 내려가는 화살표처럼,
‘ㅅ’은 체크표처럼 그려 보였다.
낮음과 나아짐. 같은 소리의 두 길이 서로 다른 곳을 가리키고 있다고.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가 이내 잔잔하게 빛났다.
“아, 그렇구나. 오늘도 하나 배웠네요.”
그 말이 교실 공기 속에서 오래 머물렀다.
얼마나 예쁜 문장인지. 배웠다는 사실을 조용히 꿀꺽 삼키는 태도, 배움을 기쁨으로 말하는 숨결.
그 순간 나는 문득 생각했다. 나도 아이들에게서 날마다 배우는데,
정작 “선생님도 오늘 하나 배웠다”고 말해본 적이 있었나.
학기 초를 떠올리면, 교실은 서로의 뾰족한 말을 겨우 견디며 버티던 계절이었다.
헐뜯고 소리 지르는 날들이 반복되었고, 나도 아이들도 지쳤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아이들의 말에 모서리가 둥글게 깎여 나가기 시작했다.
“왜 그랬어” 대신 “나는 속상했어”라는 문장이 등장하고,
“내가 해줄게”라는 말들이 오고 갔다.
그 변화는 저절로 오지 않았다. 교실을 둘러싼 안 밖의 다정한 어른들의 온기, 서로의 손길,
그리고 무엇보다 장면을 품은 그림책들이 오갔다.
우리는 책 속 인물들의 마음에 손을 얹어 보았고,
말을 잃은 날엔 그림의 색으로 마음을 건넸다.
아이들은 어른에게서도, 때로는 친구에게서도 만나지 못했던 세계를 책에서 만났다.
모르는 단어는 나눠 뜻을 짐작해보고, 새로운 표현은 소리 내어 맛보았다.
어느새 “낮다”와 “낫다”를 구분해 묻는 아이 앞에서,
나는 배움이란 결국 해독이 의미로, 의미가 말로, 말이 다시 삶으로 번지는 과정임을 다시 확인했다.
가만 보면, 아이들의 말은 자라난다.
먼저 소리로 싹을 틔우고, 뜻으로 잎을 펼치며, 문장으로 꽃을 피운다.
그리고 마침내 누군가의 하루를 덥히는 따뜻한 문장이 된다. “오늘도 하나 배웠네요.”
그 말에는 겸손과 자부심이 함께 들어 있었다.
배움 앞에서 작아지는 마음, 그러나 배웠다는 사실을 기쁘게 말할 줄 아는 용기.
나는 그 말 한 줄에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보았다.
교사인 나는 학생들에게서 정말 많이 배운다. ‘낮음’과 ‘나아짐’을 구분하는 법을,
틀림과 다름을 다르게 받아 적는 법을, 그리고 말이 달라지면 관계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언젠가부터 우리 반에는 “미안해”와 “고마워”가 제때 나왔고, “다시 해볼래요”가 지도를 따라 나왔다.
아이들의 말이 바뀌자, 교실의 시간도 덩달아 달라졌다.
느리게 흐르던 배움이 ‘서둘지 않는 자신감’으로, 조급했던 마음이 ‘기다릴 수 있는 체온’으로 바뀌었다.
그림책은 그 변화를 밀어 올리는 봄빛 같은 존재였다.
인물의 마음을 따라가며 “왜 그랬을까?”를 묻는 사이,
아이들은 스스로의 마음도 들여다보는 법을 배웠다.
이야기의 장면을 붙잡아 말로 옮기는 동안, ‘어떻게 말해야 상처가 나지 않을까’를 함께 배웠다.
책은 교과서보다 느리게, 그러나 더 깊게 우리를 데려갔다.
낯선 세계를 한 장 한 장 넘기는 동안, 아이들의 어휘는 넓어지고 시선은 길어졌다.
말이 풍성해지자 마음도 넉넉해졌다.
오늘, 아이의 “하나 배웠네요”가 내 안에 오래 남는다.
나는 그 말에 대답하고 싶다.
“그래, 선생님도 오늘 하나 배웠어. 네가 ‘낮다’와 ‘낫다’를 구분하며 건넨 질문 속에서,
배움은 낮아지는 겸손을 지나 결국 서로를 더 ‘나아지게’ 하는 길이라는 걸.”
아이들의 보물 같은 말이 가을과 함께 왔다.
말의 온도는 교실의 계절을 바꾸고, 계절은 마음의 풍경을 바꾼다.
나는 내일도 칠판 앞에 서서, 아이들의 말이 자라는 장면을 지켜볼 것이다.
틀릴 권리를 허락하고, 다시 말할 기회를 건네며,
그림책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마음에 귀 기울일 것이다.
낮음과 나아짐 사이에서, 우리는 함께 배운다.
그리고 그 배움은, 언제나 아이들의 말에서 시작된다.
오늘도 하나 배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