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에서 시 낭송을 한 아이. 이제는 엄마가 무대에 설 차례
"테오야, 학교에서 발표회 한다는데 하고 싶은 친구만 하는 건데 너도 한 번 해 볼래?"
"아니 난 부끄러워서 싫어."
그렇게 첫 번째 꿈과 끼 발표회는 지나갔다.
3개월 후
"테오야, 지난번 엄마가 이야기했던 발표회 다시 하는데 이번에는 어때?"
"싫어. 다른 사람들이 그럼 나 쳐다볼 거잖아."
"그래 알겠어. 그래도 한 번 도전해 보면 좋을 텐데."
또다시 3개월 후
역시 같은 대답.
"자 이젠 정말 1학년 마지막 발표회야. 이제 지나가면 더 이상 기회는 없어."
"음..."
'어? 아이가 좀 주저하네. 한결같던 대답이 좀 흔들리네.'
기회는 이때다 싶어. 발표회에 나가면 좋은 점을 손가락을 뽑아 나열했다.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발표회에 나가면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평생 써야 할 자신감은 이때에 다 생기고
재능도 다 펼쳐지고 나도 모르던 꿈이 생기는 그런 신기한 마법의 우물 같은 것이다.
"음... 근데 나 좀 떨리고 자신은 없는데. 그리고 난 내가 뭘 잘하는지 모르는데."
"테오야. 엄마가 도와줄게. 같이 준비해 보자. 그리고 네가 잘하는 게 얼마나 많은데."
"음... 알겠어. 그럼 한 번 해 볼까?"
그렇게 아이는 발표회에 신청서를 내고 무대에 서기로 결심하였다.
이제 발표회까지 남은 시간은 3주.
자, 그럼 뭘 발표할까?
다른 친구들이 하는 것을 보니 피아노와 태권도, 줄넘기... 다양하다.
그럼 우리도 피아노? 이제 배운 지 한 달 되어서 도레미를 치기 시작했는데 아직은 좀.
그럼 첼로? 이것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조율도 내가 못해주는데
그럼 뭘 하지? 괜히 해보라고 했나?
이때부터 아이의 꿈 찾기가 아닌
내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 찾아보는 시간이었다.
'오늘 보니 아이가 조용히 앉아 색종이 접는 걸 좋아하는구나.
그럼 종이접기를 발표해 볼까?'
'오늘은 아이가 사자소학 쓰는 걸 좋아하네.
그럼 사자소학 발표?'
아이를 찬찬히 바라보게 되었다.
아이의 시간, 취향, 놀이, 이야기...
예쁘지 않은 것이 없다.
아이의 이야기는 다 노래이고, 이야기다. 그 이야기가 잔잔하게 쌓여 아이의 하루를 만들고 일주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특별히 무엇인가 찾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하루가 모두 이야기였던 셈이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무엇을 발표할지에 대한 열쇠를 아이에게 넘겼다.
"네가 한번 직접 찾아봐. 뭘 발표하면 좋을까?"
조급해하지 않고 기다리니 아이가 찾아왔다.
"엄마, 나 그럼 좀 부끄러우니까 짧은 거 하고 내려올까? 시 읽을까? 시는 짧잖아."
'세상에! 시라니~'
엄마의 발표회 리스트에는 입력된 적이 없는 것이었는데 역시 아이에게 맡기길 잘했다.
아이의 저녁 루틴 중에는 시 필사가 있다.
내가 수업자료로 쓰려고 갖고 온 동시 책을 따라 쓰고 싶어 하기에 주었더니
매일 밤 열심히다.
한 10장쯤 한 뒤 슬슬 꾀를 내기도 하지만
한 번 시작한 것은 끝까지 해야 한다는 엄마의 말에 집에 오자마자 한 장을 후딱 베껴 쓰고 꽂아두고 있다.
아이가 필사했던 시 중 두 편을 골라 보라고 하였다.
신중에 신중을 더 해 아이가 고른 시는
그중 가장 짧은 시 두 편
그렇게 아이는 자신의 발표회에서 고운 목소리로 이야기할 두 편의 시를 직접 골랐다.
매일의 시간이 흐른다.
그리고 매일 밤 아이는 시를 낭송한다.
엄마를 앞에 두고, 엄마 한 명이 어느 날은 10명, 100명의 관객이라 여기며 낭송한다.
이미 외워 "눈"이라는 키워드만 나와도 줄줄줄 나오는 그 시를
아이는 읊고 읊고 또 읊는다.
아이는 알까?
매일 밤, 찬 바람이 불어오던 시간
밝고 낭랑한 목소리로 시를 읽어 주던 그 시간이 엄마에게 얼마나 큰 따뜻함과 위로의 시간이 되었는지?
아이의 호흡, 연과 연 사시의 빈 공간까지도 아이가 엄마에게 주던 노래였다는 것을 이 아이는 알까?
발표회가 일주일을 앞두고는
시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올 늦가을 박진환 선생님께 들었던 글쓰기 연수 중
'시'에 관한 연수를 듣고 배운 것을 그대로 적용해 본다.
하루는 연필로 따라 쓰고, 다음날은 네임펜으로, 그다음 날은 시에 그림을 그리고
다음 날은 색칠을 하고
시를 온몸으로 만났다.
발표회가 있던 어제 오후.
아이가 무대에 오른다.
숨을 쉴 수 없이 떨려온다.
2분.
참 긴 시간이다.
2분이 이렇게 길었던가?
아이는 차분하게 시 낭송을 이어간다.
아이의 밝고 맑은 목소리가 눈이 되어 내리는 듯하다.
'와짝 떠라.'
와짝의 의미를 알려주려고 감았던 눈을 과장해서 뜨다가 눈 둘레근 근육 경련이 날 뻔했던
시간도 있었다.
시의 단어를 온몸으로 주고받았다.
" 엄마 와짝이 무슨 뜻이야."라고 묻던 아이의 목소리가 기억나며
긴장에 녹아내릴 것 같던 나의 마음도 쫘악 떠졌다.
매일매일 아이는 시를 쓰고 읽었다.
이미 외워진 시를 읽고 또 읽고,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무엇인지 함께 이야기하고 나누었다.
아이가 발표한 것만이 시가 아니다.
2분을 위해 쌓아가던 매일의 시간 그 시간이 함께 시가 되어 왔다.
말없이 소리 없이 다가와
날씨만큼 차가워진 엄마의 무딘 가슴도 뜨게 했다.
아이가 무대에 서는 것을 보며 나도 배웠다.
아이의 어느 한순간도 무의미한 것은 없다는 것을.
그것들이 쌓여 이야기가 되고 목소리가 된다는 것을.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아이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시간을 만들어 보게 하면
아이는 더 큰 목소리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아이도 느꼈을까?
그 매일의 시간이 한 편의 '시'가 되었다는 것을?
한 번의 짧은 무대를 위해 준비해야 하는 매일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그 과정에는 어느 한 것도 소홀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을 온몸을 느낀 시간이 아니었을까?
이야기의 한 단어를 만나기 위해서는 마음과 몸의 노력이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과 몸이 함께 만난 오늘 너의 무대가 바로
아름다운 시 한 편이었다.
아이야
짧은 두 편의 시를 이야기하며
네가 태어났던 지금의 계절에
온 감각을 열어 너와 소통하고자 했던 그 마음들이 생각났단다.
네 낭송은 그러했던 것.
잊혀 가던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힘이 있었고
너의 도전에 새로운 도전을 주저하던 엄마에게도 도전으로 다가오는
그런 힘이 있었단다.
작지만 강하게
짧지만 길게 남아 있단다.
이제는 엄마도 엄마의 이야기를 찾아보려고 해.
네가 보여준 것처럼
어렵다고, 두렵다고 피하지 않고
하루하루 온몸으로 그것들을 만나다 보면
엄마도 언젠가는 이야기하겠지.
엄마의 무대에서,
엄마의 시간이 쌓은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