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와 걱정, 불안과 욕망을 모두 끌어당기는
한동안 우리를 힘들게 했던 아이의 '아픔'이 나아지고 있다. 아이는 그간 자신을 괴롭혔던 구토감이 어쩌면 '트림감'일지도 모르겠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진 모양이다. 학교에서도 여전히 단짝은 없지만 점심시간에 싫어하는 반찬을 바꾸고, 나누어 먹는 친구들이 늘어나고 있다. 절교를 선언했던 친구와도 한 번씩 인사를 주고받는다고 한다.
이럴 거면 뭐 하러 그렇게 애를 먹였나 싶다가도 이것이 인생의 부침이라는 거지,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도 조금 여유가 생겼는지 선비 같은 소리를 하는 것이다. 그러다 우연히 어떤 아이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아이를 A라고 하자. A의 반에 한 여자아이, B가 전학을 왔다. A와 B는 같은 모둠이 되었다. 그런데 B가 자꾸 사람을 가린다. 자기가 친해지고 싶은 C와 D에게는 잘해주는데, 친해지고 싶지 않은 다른 아이들에게는 차갑기가 쏜 물 같은 가보다. (차갑기가 쏜 물 같다, 는 표현은 이번에 읽은 김금희 작가의 '대온실수리보고서'에 나오는 표현인데, 너무 마음에 들어서 자주 쓰고 싶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주 쓸 일이 없었으면 좋겠기도 하다.) 아마도 A는 B가 친해지고 싶은 친구 목록에 들지 않았는지 B와 사이가 썩 좋지 않은 모양이다. 이 이야기를 엄마에게 하며 서운해했다고 한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참 아이들 관계 복잡하다, 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내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이 이야기가 나에게 준 생각거리는 다음과 같다.
1. B는 나쁜가.
그저 모든 아이와 친해지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굳이 친해지고 싶지 않은 아이들에게까지 친절해야 할 이유는 없다. 물론 의도를 가지고 괴롭히거나 예의, 매너 없이 행동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면 용납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내가 B에게 '굳이 친해지고 싶지 않은 아이'라고 했을 때는 이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제삼자 입장에서는 별 일 아니겠지만, 막상 누군가 나에게 쏜 물처럼 차갑게 대하면 신경 쓰이는 것이 사실이니까.
즉, B의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갈등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하다.
2. 어른들에게도 B의 그러한 행동이 나쁘게 보일까.
그 반의 담임 선생님은 B의 이러한 특성을 알고 있을까. 남편에게 물어보니 한 학기 정도 지켜본 담임이라면 모를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일단 B는 이제 막 전학을 온 전학생이다. 그리고 어쩌면 담임이 꽤나 무심한 타입일 수도 있다.
무심하다고 가정을 했을 때 담임은 B의 이런 행동을 알아챌 수 있을까. 모둠 활동 하라고 4명씩 묶어주면 대체로 결과물은 나오기 마련이다. 게다가 B는 친해지고 싶은 친구에게는 매우 잘해주기 때문에 어른들 눈에는 활달하고 적극적인 아이로 비칠 수 있다. 다시 말해 어른들 눈에는 B가 아무 문제없는 아이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한 이유는 아무리 봐도 내 아이의 치명적인 단점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물론 사소한 단점을 찾자면 끝도 없다. 하지만 친구들에게 절교를 당할 만큼 심각한 문제는 없었다. 그 결과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라고는 좀 더 친절할 것. 좀 더 양보할 것. 좀 더 들어줄 것. 따위의 것이었는데 아이에게는 아직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나와 우리 가족은 아이의 힘든 상황에 대해 '삶이 우리를 속일 수 있지. 잠잠히 버텨보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같이 놀 친구가 없는 아이를 위해 집에서 맛있는 요리를 해 먹었고 주말마다 바다로, 공원으로 떠났다. 그 덕에 우리 가정은 다시 평화를 찾았고 시간이 흐르자 아이의 아픈 상황도 많이 호전된 것이었다.
그러다 A와 B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마음이 불안해졌다. 혹 내 아이가 B 같은 아이라면? 어른들이 얼핏 보기에는 아무 문제없지만(실제로 아이의 담임 선생님께서도 아이를 칭찬하기만 했다.) 아이들 사이에서는 심각할 수 있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하지?
뭘 어쩌겠는가. 방법은 없다. 아이의 면면을 모두 알고자 아이의 옷에 녹음기를 달아서 보낸다거나 매 순간 따라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이에게 오늘 하루 동안 친구들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생각을 했으며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모두 말하라고 할까? 그랬다가는 한 달도 채 되지 않아서 정신병에 걸리고 말 것이다.
아이는 블랙홀이다.
별 것 아닌 일에도 나를 격하게 만들고 그 감정을 빨아들인다. 기쁨과 감사, 환희와 감격, 불안과 슬픔, 죄책감과 희망까지.
그걸 다 빨아들이면서도 속을 보여주질 않는다. 나는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마치 지구에서는 태양의 뒤편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영원히 서로를 알지 못한 채 빙글빙글 돌기만 할 것이다. 빙글빙글 도는 이 거리가 최적의 상태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면 나는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테니까.
인정하자. 내 아이는 생각보다 이상한 아이일 수도 있다.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최악의 단점을 가지고 있어서 앞으로도 번번이 절교를 당할 수 있다. 초등학교는 물론이고 중학교 때에도, 고등학교 때에도 미움을 받느라 힘든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아주 어쩌면 학폭에 휘말릴지도 모른다. 그 모든 위험을 100% 피할 수 있는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너무 불안하다.
불안할 때는 나를 생각한다. 나 역시 치명적인 단점을 가진 불완전한 인간이다. 수십 번, 수 백번은 친구들을 곤란하게 만들고 마음 상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쩡한 어른이 되어 잘 살고 있다. 생각할 때마다 전화해서 상대방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은 일들도 있지만, 이불킥으로 모자란 흑역사를 수십 편을 가지고 있지만 어쨌든 살아 있다.
내 아이도 어떻게든 살 것이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모르는 시기를 지나, 알고 지하로 내려가는 시기를 지나, 그래도 난 좀 낫지 않나 싶은 자아도취의 시간을 지나, 이불킥을 하는 시간을 지나, 살아갈 것이다. 블랙홀처럼 오래오래.
내가 할 일은 역시나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