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외할머니가 편찮으셨다. 여든이 넘으셨으니 여기저기 아픈 것이 이상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엄마와 이모들은 내내 마음을 써야했다.
혼자 계시는 외할머니 걱정은 평소에는 할 일이 없다. 주변에 어르신들께서 서로서로 보살펴주시거니와 엄마와 이모들도 자주 통화를 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한 번씩 편찮으시면 딸들, 그 중에서도 엄마의 마음이 가장 복잡해진다.
엄마는 일남오녀 중 셋째 딸이다. 외삼촌이 막내시니, 엄마를 낳고 이모 둘이 더 태어나는 동안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마음이 어땠을지 막연히 이해는 된다. 하지만 이런 사정을 헤아리더라도 엄마의 억울함은 쉬이 가시질 않는 모양이다. 그 응어리는 여태 남아서 엄마와, 엄마의 엄마 사이에 놓여있다.
이전에 외할머니가 아프셨을 땐 엄마가 며칠 집으로 모셨다. 외할머니의 집과 병원 둘 중 어느 곳과도 가깝지 않았지만 엄마가 해야했다. 그 당시에도, 지금도 가정주부인 딸은 엄마 뿐이니까. 추측컨대 그 경험이 엄마가 가지고 있는 외할머니에 대한 마음을 선명하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 때는 다 그랬다, 고 한다.
딸들은 하고 싶은 공부를 충분히 할 수 없다.
건강하다면 도시에 나가서 돈을 벌어야 한다.
그 돈을 고스란히 집으로 부쳐야 한다.
엄마의 10대는 그렇게 흘러 갔다. 구로 어느 공장에서 미싱을 돌리면서.
첫째 이모와 둘째 이모는 몸이 약해서 집에 누워있었고 셋째 이모는 이런저런 복잡한 사정으로 타지에 있었다. 막내 이모는 막내라는 이유로 고등학교까지는 다녔다고 한다.
우리 엄마만. 우리 엄마만, 배우지도 못하고 피하지도 못한 채 일을 해야 했다. 엄마는 결국 그 인생에서 벗어나고자 아빠와 결혼을 했고 불행해졌다.
가끔 엄마가 이런 얘기를 한다.
"그 때, 우리 엄마가, 집은 신경쓰지 말고 돈 벌어서 너 하나 먹고 살아라, 그렇게만 말했어도."
가난했을 것이다.
능력없는 외할아버지와 아픈 두 딸, 그리고 어화둥둥 귀한 아들까지 거두려면 외할머니 마음도 갑갑했을 것이다. 그래서 기댈만한 곳을 찾는 다는 게 아마 우리 엄마였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엄마가 서운했던 것도 어쩌면 그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수고했다는 한 마디,
네 덕이라는 말,
고맙다,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는 말이 있었더라면.
엄마는 힘이 났을지도 모른다. 내가 벌어 내 가족들 건사한다는 뿌듯함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말들은 없었고, 엄마의 마음도 식어갔다.
그리고 그 식은 마음이 내 유년이 되었다. 사랑한다는 말도, 잘했다는 말도, 속상하지, 라는 공감도 없는 유년의 날들.
다시 외할머니가 편찮으셔서 무릎 수술을 받을 때, 엄마는 나에게 말했다.
"정말 미안했어. 그 때."
엄마는, 엄마의 엄마를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를 깨달았고, 당신에게도 그러한 이유가 있음을 깨달았다. 나에게 그 마음을 전하기까지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나도 안다.
그러고보면 엄마는 엄마의 엄마보다 조금 더 따뜻하다. 그리고 나는 엄마보다 조금 더 따뜻한 엄마다. 가끔 나는 엄마와 나에 대해, 이 정도면 됐다, 고 생각한다.